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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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1-07 22:13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성경해석과 알파벳


1.
“그 성경신학”이 성경해석을 전제하고 정통교리를 벗 삼아 지난날 서방 신학을 넘어선 신학 개진의 열매이다. 성경강론으로 확인하면서 마침내 교회 체제를 뜯어고치는 개혁으로 마무리했다. 앞으로 속 알맹이를 크고 작게 손질하면서 확인 검증하는 일이 여러 분야에서 산더미처럼 기다린다. 그 바탕 구실을 바로 원어 성경 분야에서 담당한다. 이것이 출발점인데 소홀히 하거나 게을리한다면 신학사에서 빛을 잃는다. 아무리 원어 성경을 들이밀어도 성경해석원리가 건전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정통교리를 깔보지 않지만 얽매이지도 않는다. 교리개혁에도 원어 성경 구실이 빛난다. 또한, 우리 말글로 번역한 직역 성경이 있어야만 한다.
모든 작업에 언어관이 들어간다. 기존 언어학이란 서구 언어의 한계에서 맴돈다. 개혁신학도 서구 언어학을 못 넘어선다. ‘언어가 무엇인가’를 알고 그 쓰임새를 파악하여 계시 언어를 겨레말로 다스려야만 한다. 성경 계시 안에 담긴 언어들을 꿰뚫어야 한다. 서방 신학이란 이것을 감당할 수 없고, 배달말로써 한 걸음을 더 내디딜 수 있다. 현대히브리어를 모체로 꼼지락거리지만 어림없다. 언어를 이루는 근본요소인 문자 훈과 형·음·의를 오롯하게 지닌 말글이 바로 우리 배달말이다. 비록 이지러져서 대부분 다른 언어처럼 유치해졌지만 원어 성경을 놓고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성경해석이 기본조건이기에 원어 성경을 배달말로 다루면 된다.

2.
번역한 성경을 토대로 서술한 “그 성경신학”이기에 성경 번역이 중요하다. 번역이란 직역을 기본으로 이루어지며, 의역은 학술 분야에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번역 안에 해석요소가 될 수 있는 한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구약 안에서도 앞선 계시를 여러 가지 형식으로 번역한 게 보인다. 나아가 구약을 신약으로 옮기는 이정에 나타난 번역형식을 알아야만 한다. 또 지난날 개혁자들이 여러 겨레말로 번역한 역본을 참고해야만 한다. 섭리 가운데 마침내 우리말로 성경 번역을 했는데 이제는 그 성경신학을 통해 성경해석원리를 확인하면서 번역해야 한다. 이 작업 가운데 그 성경신학이 가다듬어진다. 원어를 우리말로 다스린다.
성경 계시가 예호바[여호와]를 가르치지만, 구약 계시에만 보이고 현존 신약 계시에는 안 보인다. 게다가 세계성경공회들에서 음역을 버리고 “주[主, LORD]”로 통일시켜버렸다. 이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라 큰 잘못이다. 하긴 현존 히브리어 구약성경들을 보면 예호바를 아도나이로 아예 바꾼 부분들이 상당수 보인다. 이런 것을 지나친다면 이미 변질된 것이다. 타락한 세상의 언어학 이론에 빠져서 성경관이 무너졌다. 현존 우리말 성경들이 모두 그렇다. 게다가 우리말을 보면 정음에서 너무나 다르게 변질했기에 이것부터 바로잡아야 바른 번역이 가능하다. 배달말이 중국어와 일본어 말투와 영미 문법으로 뒤범벅이 되어 갈 길이 멀다.

3.
계시에서 엘로힘이 예호바이심을 예수스가 흐리스토스이심으로 나타내셨다. 성호들을 넷으로 표시했는데 이 이름 계시들을 음역하는 데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히브리 말과 헬라 말이 음소와 문자에서 다르기에 조심해야 한다. 그동안 서방 언어들이란 원어를 못 넘어선다. 유일하게 우리말이 두 원어를 넘어선다. 이것은 보통 은혜가 아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사명이 크다는 말이다. 예수스를 “예수”로, 흐리스토스를 “그리스도”로 음역하여 뒤바꿨는데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 계시를 이렇게 음역한다면 우리말이 아니다. 껍데기만 우리말이지 속은 다른 나라 말이다. 번역이란 이미 해석한 열매이기에 조심해야만 한다. 모르는 사이에 더러워질 수 있다.
예수스가 구약에서 예호슈아로 나타난다. 흐리스토스가 히브리어와 같은 뜻을 지닌 헬라 말에서 만들었다. “마샤흐”에서 나온 마쉬아흐를 “흐리오”에서 나온 흐리스토스로 뒤바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말로는 어떻게 해야 마땅할까? 기름 붓다에서 만들면 ‘기름 부어진 분’ 정도인데, 아무튼 뿌리부터 다져야 한다. “그리스도”는 중문 ‘契利斯督’에 대한 일본어 발음을 따른 표기이다. 이것에 대해 자세히 다루는 자리가 아니지만, 우리말본에 맞게 뒤바꿔야만 한다. 이것을 무시하면 언어 사대주의에 빠져 언어 줏대를 잃는다. 이미 다른 나라가 해석한 것을 받아들인 것이기에 본디 뜻에서 멀어졌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 계시들을 음역할 때부터 심각한 문제이다.

4.
올바로 직역하여 뒤바꾼 우리말 성경으로 그 성경신학을 연구하여 가다듬어야 한다. 원어에 담긴 성경해석원리가 번역 성경에서 계승되어 한 걸음 더 전진한다. 번역 성경을 강론하면서 성경 계시가 권위 있게 나타난다. 이런 모든 이정을 성령이 다스리신다. 우리 정음으로 원어 성경과 번역 성경 그리고 성경강론에 나타내야 한다. 성경해석을 마구잡이로 한다면 타락한 언어의 노예로 전락하여 뜻을 왜곡시킬 수 있다. 모든 언어에 깃들인 공통 성질과 배달말에 남다르게 밴 성질을 갈라서 써야 한다. 차원이 다른 으뜸가는 언어를 받은 배달겨레인데, 성경으로 신학개혁에 앞장서야 한다. 이 모든 방면에 바로 성경해석이 중심으로 담겨있다.
음소 조합문자로서 배달말이 어떤가를 알아야만 하는데, 세상 나라에서 가로막았다. 28개 정음 음소가 지닌 뜻과 쓰임새를 바로잡아 성경 계시를 해석하여 풀어 밝힌다면 큰 선물일 것이다. 배달말 직역 성경으로 그 성경신학을 연구하여 펼친다면 역사 이래 교회개혁에 큰 이정표로 써주시리라 생각해본다.
언어관과 해석관은 붙어있다. 성경의 짜임새[구조]를 만들고 살펴보려면 언어관에 영향을 받는다. 이른바 문학·역사·철학이 언어 안에 담겼기에 조심해야 한다. 언어의 짜임새를 모른다면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게 된다. 우리말글이 철저히 망가졌기에 지금 상태에서 줏대 있게 다룰 수 없다. 우리글을 모르면 다른 나라 말에 빠져 우리 역사를 부정하게 된다.

5.
알파벳이 성경해석에 미치는 힘이 놀랍지만, 사람이 알아차리기 어렵다. 성경 번역과 성경해석 그리고 신학 작업에 바탕소리가 근본 토대로 작용한다. 언어로 성경을 파괴했는데 이른바 구조주의라는 틀로써 철저히 뭉갰다. 원문비평작업에도 이미 서구 언어관이 장악했다. 우리말글을 뜯어고쳐서 바로잡는 일이 너무도 시급하고 중요하다. 아무리 목청을 돋워도 연장에 문제가 있는데 어찌 하리요? 우리 문자가 일그러졌는데 이것이 성경해석에 미치는 힘은 크다. 다른 나라 말투로 둔갑했기에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기 어렵다. 무엇이 어떻게 비틀어졌는지부터 모른다면 모든 것이 헛수고로 돌아간다. 중국어의 독, 일본어의 독, 서구어의 독이라는 삼독을 알고 어서 벗어나야만 한다.
한자 표기도 우리 한자로 고쳐야 하는데 너무도 큰일이다. 우리 한자를 모르면 정음을 충분히 알지 못한다. 왜 줏대 있게 신학 작업을 못 하는가? 수입신학의 바탕에 외래어가 주름잡는다. 이미 서구신학은 끝장났다. 지난날의 문서 조각으로 연명하고 있다. 우리 또한 장담하지 못 한다. 세속 말글살이가 엉터리 표준말과 한글맞춤법에 묶여서 우리 바탕소리가 죽는다. 쓰기와 읽기에서 뒤죽박죽이다. 무엇부터 바로잡아야 성경해석에 바른 기틀을 마련하겠는가? 문자가 망가지니 어근을 잃어버리고 우리 사상이 사라진다. 어른이 갓난쟁이를 흉내 내는 격이다. 성경신학을 연구하여 가다듬으려면 우리 알파벳부터 바로잡아 성경 번역에서 열매를 나타내야만 한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리종연 목사 (서울진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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