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오피니언

 
작성일 : 18-04-12 19:06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아홉. 성경권위 확정의 절실함을 향해, 미완으로 끝날 유럽의 종교개혁 2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갈 3:22~27)


2.    아우구스티누스의 ‘좌파’ 후예:
비성경적 ‘자유의지론자’ 에라스무스   

1490년대부터 1517년 독일의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까지 유럽 사회 전반적 분위기는 ‘미래에 대한 흥분’이었다. 1453년 동로마제국의 패망 이후 수많은 종교인들과 학자들, 정치가들과 군인들의 서유럽의 이동, 서방의 교황권과 주교 권한의 약화, 문예부흥을 통한 고대 그리스-로마의 문학과 예술의 부활, 종교적 몽상을 혁파하는 계몽 군주들의 약진, 그러한 군주를 돕는 많은 자유사상가들의 등장, 산업과 금융을 통한 신재벌 등장 따위들이 유럽인들의 기대감의 배경이 되었다. 이 모든 분위기 속에 성경주석과 편집을 통해 향후 유럽 지성계에 위대한 인본주의를 심어놓는 인문주의자가 있었다. 네덜란드 가톨릭 사제의 사생아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9~1536)였다.

사생아 신분으로 수도원으로 보내져 자신의 삶을 출발한 에라스무스는 ‘모든 유럽이 소유하고 싶었던’(381쪽)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한테도 구속당하지 않았던 유럽의 풍운아로 살았던 프리랜서였다. 학문과 지성의 발전에서 그리스어와 문법의 소중함을 가장 강조한 인문주의 학자였다. 신약성경 번역과 편집과 주석에 대해 평생 동안 보였던 그의 지대한 관심은 로마 가톨릭이든 프로테스탄트 교회든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개혁파 신학의 전통에서 보면 그가 말한 ‘자유로운 사상’의 정체성은 여전히 자유의지론으로 귀결된다. 마치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상은 아니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역할과 모습을 많이 닮았다.

그의 사상이 어떠했는지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있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1500년에 출판한 『격언집』이다. 그는 이 책에서 성경과 그리스 고전을 섞어서 기막힌 편집과 해설을 달아 출판하였다.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무슨 상관이 있냐’고 비판했던 초대 교부 테르툴리아누스와는 정반대로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서로 관련되면 얼마나 기막힌 합성이 되는지 분명하게 입증한 책이다. 그는 문예부흥의 기대감으로 들떠있던 유럽 지성계의 근대로 향한 사상계의 약진을 앞의 주석·편집서를 통해 더욱 빠른 속도로 몰아붙이는 역할을 했다. 나아가 영국으로 옮겨간 그는 해박한 그리스어를 통해 종교개혁 발발 직전 1516년에 본문 주석이 들어간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출판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교부였던 오리게네스의 오래된 주석 방법인 ‘풍유적 해석’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문법과 정확한 독해에 더욱 충실할 것을 요구했다. 로마 가톨릭의 마리아 숭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억지 해석을 치명적인 가톨릭의 오류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마리아의 영원한 처녀성에 관해서는 설명할 수는 없지만 믿는다(384~5쪽)고 말함으로 지성과 믿음의 경계를 긋기도 했다. 이는 로마 가톨릭에게는 성경해석의 권한이 가톨릭교회에 있다는 것을 열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그는 성경관에 대해서는 교부 전통과 중세 가톨릭의 후예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에라스무스는 유럽 전역의 방랑자가 되면서 말과 글을 통해 로마 가톨릭 사제들의 비행을 고발하는 비판적 언론 역할을 하기도 하여 종교개혁의 원인 제공자가 되기도 한다. 성직자에 부여된 비성경적 과도한 특권, 무식하지만 종교적 권위로 아는 척하는 가식적인 사제들에 대해 맹공을 퍼부었다. 사제들의 무능과 무식을 고발하고 신학자들의 교만과 오만, 기만과 태만에 대해 비판했다. 그리고 대중들에게도 신성한 무엇인가를 물질처럼 보거나 만지고 싶어 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질타했다. 왜냐하면, 그는 언어 사용의 문법을 중요하게 여겼고 논리학을 지식의 근본으로 보았으며 성령의 능력은 지성을 통해 확정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이성에 기반을 둔 ‘기독교 철학’을 구가했으나, (개인적 비난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인 것은) 돈을 주는 후원자에게 맞는 글을 써줘야 했기 때문에 신앙적인 진위가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평을 받는다. 다시 말해 그가 출판한 책들의 종교적 진리 주장의 일관성이 약하다는 것이다. 지성은 지성이고 신앙은 신앙이라는 분리를 에라스무스 사상의 원칙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일관성 없는 그의 학문의 족적을 합리화해주기에는 충분하지는 않다. 이 와중에 그의 지적 정보에 덕을 가장 많이 본 사람들은 ‘군주’들이었다. 왜냐하면, 군주의 관심은 로마 가톨릭에도 얽매이지 않고 프로테스탄트 교도도 되고 싶지 않고 다만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시민들에게 호감이 가는 정치적 타협안을 제시하기만 하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보의 저장고 역할을 해 준 곳이 에라스무스의 저서였다. 그래서 군주의 통치철학이나 전쟁에 관한 그의 생각들이 저서에서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보면 에라스무스는 자유의지론을 강조하는 인문주의자였다.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티즘의 공동 조상인 아우구스티누스처럼 두 진영이 모두 에라스무스를 적절하게 이용하기는 했으나, 에라스무스는 자유의지를 해치는 종교적 전통을 철저히 거부한다. 그래서 그는 종교개혁자가 아니라 자유의지론에 충실한 인문주의자이다. 사상에 대해서는 물론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론과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이 섞일 수는 없다. 이러한 그의 전통은 이후 성경권위를 지키려는 종교개혁 사상과 개혁파 신학에 맞서는 향후의 많은 급진적 종교비판가의 뿌리가 되기도 한다.

<158호에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대 배도, 어떻게 오는가!
한국교회 개혁, 가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