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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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10-23 19:22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교회개혁 특별기획 좌담회 9- ‘교회 헌법’의 비성경적 불법성 폭로와 대안 찾기


본 연재는 <한국크리스천신문> 교회개혁 특별기획 좌담회를 지면으로 옮긴 것으로, 이번 좌담회에는 박용기 원로연구원(성경신학학술원, ‘성경신학총서(The BibleTheology Series)’ 저자)과 박홍기 박사(성경신학학술원 연구원), 성경신학 학술원 연구생 다수와 배윤리(한국크리스천신문 객원기자) 권사가 참여하였다.

대담
객원기자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제12장은 ‘양자됨’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고백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자로 삼으심은 전적인 은혜임을 강조하면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양자로 삼아 의롭게 되었다고 합니다. 성경적인 고백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11장에서 ‘칭의’의 결론을 자유의지에 의한 인간의 자기 겸손과 고백과 회개로 끝난 것을 생각한다면, 과연 제12장 양자됨에 대한 고백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양자됨의 문제를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지 좌담회를 진행해 주시길 바랍니다.


성경 전체를 알지 못한 채 그 맥락을 벗어나 성경으로 고백서를 만드는 것은
성경적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성경을 인본주의 철학 속에 매몰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박홍기 연구원  이 고백문을 얼핏 보면 하나님의 양자됨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을 서술하고 있으며 성경에 근거를 두면서 구성한 것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장을 좀 더 잘 살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와 특권을 누린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요한복음 1장 12절과 로마서 8장 17절을 성경적 근거로 제시합니다. 그런데 요 1:12은 앞뒤 맥락을 살펴보면 양자됨은 오직 ‘참 빛’으로 오신 영원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임을 강조합니다. 즉 양자는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임을 말하려는 것이지요. 그리고 롬 8:17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된 것은 전적으로 ‘성령이 증언하시는’ 사역임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을 받기 위해 고난도 받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양자됨에 대한 핵심은 (인용한 성경 구절을 주석의 측면에서 보면)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강조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양자됨에 의해 ‘우리가 자유와 특권을 누린다’는 고백문은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봅니다. 단순한 문제인 것 같지만, 개혁파 신앙을 성경에 근거를 두고 보수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문장의 주어가 ‘여호와 하나님’으로 시작하느냐, 인간으로 시작하느냐의 문제는 매우 민감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호와 계시 중심의 성경 해석과 신앙고백 나아가 교의(敎義) 수립과 신학 정립이 하나님 중심인지 인간 중심인지 결정하는 데 있어서 고백의 시작을 하나님으로 하느냐 인간으로 하느냐는 매주 중요한 문제라고 봅니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지금 연구원이 지적한 것을 더 보충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요. 신앙고백과 신학의 체계화 작업에서 성경 인용은 매우 중요합니다. 전통 신학에서 성경인용은 이미 어떤 틀을 짜두고 그것에 맞는 성경 본문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자체가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성경 기록의 논리적 흐름을 따라가면서 인간의 상식과 사상과 판단을 성경말씀을 통해 바꿔가야지 어떻게 인간이 말하고 싶은 것을 정해놓고 그것에 성경의 적당한 부분을 찾아서 삽입할 수 있습니까? 물론 이것은 가능하다고 봅니다. 성경 전체를 여호와 계시 중심으로 이해한 상태에서 특정한 신학적 주제에 접근하는 것은 그 오류가 훨씬 줄어들겠지요.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모든 고백문을 보면 어떤 방향으로 고백문을 작성할지 구성을 하고 수백 개의 성경 본문을 그야말로 적절하게 ‘써먹고’ 있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주장에 적절하지 않은 인용도 너무 많고요. 어쩌면 이 고백문을 수정하는 것보다 다시 작성하는 편이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나중에 이 고백문을 바탕으로 장로교 헌법을 작성하는 것으로 가는 과정을 보면 정말로 개탄스러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어쩌면 현재 개신교 특히 이른바 ‘성경권위’를 바탕으로 설립했다는 한국 장로교의 참담한 부패상황을 보면, 이 어설픈 고백문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S연구원  정말로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 본문을 적절하게 나열해 놓았기 때문에 어떤 문제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다른 부분들과 비교해 보면 일관성이 없습니다. 왔다 갔다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끝에는 인간의 윤리적 행위를 강조하는 방식이 이 고백서의 결정적 문제라고 봅니다. 이런 실례(實例)가 생각이 납니다. 기독교 이단들이 성도들을 유혹할 때 보면 몇 분 동안 수십 구절의 성경을 인용해서 자신들의 생각을 정당화합니다. 얼핏 보면 모두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적으로 보이지만 그 인용의 맥락을 보면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무지한 성도들은 모두 성경에서 나왔다는 말에 속아서 이단에 빠지고 있지요.     

객원기자  성경 인용 문제의 심각성을 고려하면서 다음 고백문의 주제도 살펴 주시길 바랍니다. 제13장에 보면 ‘성화에 관하여’가 나옵니다. 효력있는 부르심에 의해 중생한 자들은 말씀과 성령으로, 이 세상에서는 완전할 수는 없지만, 전인격적 경건으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13장의 고백문은 성경적인 고백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평가해야겠습니까? 참석자들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J연구생  이 부분을 보기 전에 제10장에 나타난 ‘효력 있는 부르심’을 먼저 고려하고 성화의 고백문을 살폈으면 합니다. 효력 있는 부르심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개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화에서 ‘효력 있는 부르심을 받고 중생한 자’라는 말은 이미 자유의지를 전제로 한다고 봐야 합니다. 고백문 작성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느냐 그리고 신앙 고백의 일관성이 있느냐는 신학과 신앙의 본질 문제입니다.

박홍기 연구원  지금 중요한 지적을 하셨다고 봅니다. 오늘 좌담회에서 특히 신앙고백서의 성경 인용 문제를 중요하게 지적했습니다. 성경 인용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신앙고백의 ‘논리적 일관성 문제’라고 봅니다. 먼저 비판적으로 고백서를 평가하면 일관되게 ‘인간의 자유의지’를 전제하게 하거나 결론에 가서 삽입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성경을 부분적으로 인용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성경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성을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해 흐리게 하고 결국 신앙고백서를 모순 투성이가 되게 만들어 버립니다. 성경 교사 내지 교회 지도자로서 매우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봅니다.
‘제13장 성화에 관하여’에서도 처음에는 성화는 내주하는 성령의 사역으로 시작합니다. 개혁파 입장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성화는 전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은 서로 대항한다고 합니다. 이 역시 성경을 인용했기 때문에 틀리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성경적으로 맞다고 할 수도 없죠. 왜냐하면 고백문의 결론에 도달하면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은혜 안에서 자라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룬다’고 합니다. 이 역시 인간을 주어로 잡고 있습니다. 이것이 큰 문제라고 봅니다. 성령으로 시작했으면 성령으로 마쳐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은혜’는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은혜를 주었으므로 우리가 두려워해야 거룩함에 이른다’는 이런 식이 됩니다. 우리가 경외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독립된 자유의지를 전제하고 있다고 봅니다. 이렇게 13장의 성화에 관한 고백문도 역시 10장처럼 자유의지를 숨은 전제로 두고 작성된 것으로 결론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이 완성한다는 식의 그릇된 고백문이 되고 있습니다. ‘신앙고백’ 자체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에 의한 보혜사 성령의 주관하심의 결과인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신앙고백을 신앙의 ‘조건’으로 삼게 되는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객원기자  계속해서 ‘제14장 구원에 이르는 신앙에 대하여’도 평가해 봤으면 합니다. ‘구원에 이르는 신앙’에 보면 말씀과 성례와 기도로 구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말씀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말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말씀과 성례와 기도가 상대적인 수평적 관계임을 전제로 하는 것 같습니다. 검토해야 할 사항이라고 봅니다. 이에 대한 참석하신 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Y연구생  ‘구원에 이르는 신앙’의 고백문을 보면 영혼의 구원이 마음속에 내주하는 그리스도 영의 사역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말씀의 사역으로 시작해서 ‘성례의 시행과 기도’에 의해서 신앙이 자란다고 합니다. 제1항에 나타난 이러한 고백문이 저는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저는 ‘성령에 의한 말씀 사역’이 전부라고 봅니다. 보혜사 성령께서는 자신의 영으로 기록하게 하신 성경을 중생한 성도에게 깨닫게 하여 구원의 확신과 신앙의 완성으로 이끈다고 봅니다. 그리고 성례(聖禮) 즉 성찬식과 세례식은 어떤 특별한 종교적 의식(儀式)이 아니라 복음 전파의 수단이라고 봅니다. 성찬식은 우리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기념’하며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은혜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 그 본질입니다. 그리고 세례도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사들에게 삼위 하나님의 세례를 약속하신 것(마 28:19)으로 이것은 성령께서 오심으로 ‘성령세례’로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그 결과 모든 성도들에게 내주하시는 보혜사 성령께서는 항상 성도에게 말씀으로 양육하고 계시는 것이므로 특별한 의식으로써 세례식은 큰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요즘 한국 교회는 성찬과 세례를 너무도 왜곡하고 있습니다. 점점 로마가톨릭으로 돌아가고 있는 개탄스러운 상황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성령의 말씀 사역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봅니다. 문제는 바른 복음을 전하고 들을 수 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어느 곳에서라도 성령께서 말씀을 깨닫게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히 갖게 되는 소원을 주시고 복음을 위해 살아갈 수 없는 상황과 힘을 주시기를 간구하게 하시는 일체의 모든 삶을 기도 생활로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인간이 신앙을 잘 관리해야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보혜사 성령께서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로 거저 주어지는 선물이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좋은 지적을 해 주셨습니다. 저는 제14장 제목인 ‘구원에 이르는 신앙’이라는 말부터 검토해야겠어요. 신앙의 목표와 완성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에게 성경말씀을 알게 하고 깨닫게 하여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경외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구원에 이르는 신앙’이라고 말하면 신앙의 목적이 축소되거나 왜곡될 우려가 있습니다. 사실 기존 개혁파 교회에는 성경관 자체가 ‘구속사’에 얽매여 있어서 인간이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신앙의 목표가 협소하게 굳어져 있습니다. 성경관의 축소가 신앙생활을 결국 너무 좁혀서 졸렬하게 만들어 놓았다고 봅니다.
구원은 보혜사 성령께서 성경을 깨닫게 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알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찬양하게 하면 자연스럽게 믿어지는 결과입니다. 인간의 어떠한 행위 조건을 만들어서 성도의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완전히 비성경적입니다. ‘목사가 지배하는 교회에서 목사 말을 잘 듣고 신앙생활을 잘 해야 구원 받는다’는 조건적 구원 발상은 악의적이며 비성경적 판단의 산물이라고 봅니다. 이런 관점에서 제14장 2항을 보면, 구원은 “‘은혜 계약의 효력에 의하여’ 성도들이 영생을 얻기 위해 믿고 받아들이고 의뢰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은혜로 시작해서 인간의 자유의지로 마치는 웨스트민스터의 전형적인 모순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믿고 받아들이고 의뢰하는 것’이 아니고 ‘보혜사 성령께서 성도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이 믿어지고 받아들여지게 하셔서 그 결과로 의지하고 신뢰하게’ 하십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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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는 거지다!
존 요더의 윤리학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