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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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12-26 21:25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기다리는 사람들!


기다리는 사람들은 희망이 있다. 그 기다림이 이루어질 때를 기다리는 것 자체가 희망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다림이 꼭 희망적일 수만은 없다. 사형을 기다리는 죄수의 기다림이 희망이라 말하기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기다림은 인내를 요구한다. 또한 기다림은 고통과 지루함을 동반한다. 그러므로 기다림은 그 모든 것을 대가로 지불하고도 남을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왜 기다리는가이다.

1969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작품이 있다.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는 아일랜드 태생의 프랑스 극작가이다. 한 시골길, 고목나무 아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은 강도에 관한 얘기를 한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이렇게 시작한다. 고도가 누구인지, 정말 오는 것인지 알지 못한 채로 그들은 고도를 기다린다. 1막이 끝날 즈음에 양치기 소년이 나타나서 ‘고도 씨는 오늘 오지 않고 내일 온다’고 전한다. 두 사람은 또다시 고도를 기다린다. 고도는 오지 않는다. 그러나 막이 내릴 때까지 두 사람은 여전히 고도를 기다린다. 두 남자는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린다. 언제 올지, 참으로 올 것인지도 모르는 인물을 기다리며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지나가는 사람이 가끔 등장하는 게 내용의 전부다. 고도라는 인물은 대화 내내 극본 전반에 걸쳐 계속 나오지만, 막이 내릴 때까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줄거리는 한 단어로 설명하자면 바로 ‘기다림’이다. 현대인의 고독과 소외된 삶을 막연한 ‘기다림’이라는 두 주인공의 행동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인생의 부조리를 인식하고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던 전후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작이라고 평가받는다. 어쩌면 대부분의 인생들은 이 연극의 주인공들처럼 막연히 무언가를 기다리면서, 무의미한 것들의 연속 속에서 인생을 낭비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가 원치도 않고, 기다리지도 않았던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닐까? 이 작품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혹은 고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수많은 견해가 등장했다. 어떤 이는 고도가 바로 신(神)이라고 주장하기도 했고, 교도소에 수감된 이들에게는 ‘자유’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작가인 베케트는 자신조차도 고도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말했다.

고도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이 기다림이 훨씬 더 희망적이다. 어머니와 어린 소년은 오막살이집 문 앞에서 큰 바위 얼굴을 쳐다보며, 그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어니스트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그 마을의 전설을 들려준다. 그 이야기의 요지는, 장차 언제고 이 근처에 한 아이가 태어날 것인데, 그 아이는 훌륭한 인물이 될 운명을 타고날 것이며, 그 아이는 어른이 되어감에 따라 얼굴이 점점 큰 바위 얼굴을 닮아 간다는 것이다. 아직도 많은 구식 늙은이들과 어린이들이 열렬한 희망과 변하지 않는 신념으로 이 오래된 예언을 믿고 있다. 그러나 제아무리 기다려도 그 얼굴을 가진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이 예언을 그저 허황한 이야기라고 단정했다. 아무튼, 예언이 말하는 위대한 인물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어니스트도 백발의 노인이 되었다. 저녁 해가 질 무렵에, 오래전부터 흔히 해 온 관례대로, 어니스트는 야외에서 동네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로 되어 있었다. 어니스트는 자기의 마음속에 있는 바를 청중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말은 자신의 사상과 일치되어 있었으므로 힘이 있었고, 자신의 사상은 자기의 일상생활과 조화되어 있었으므로 현실성과 깊이가 있었다. 이 설교자가 하는 말은 단순한 음성이 아니요, 생명의 부르짖음이었다. 그 속에는 착한 행위와 신성한 사랑으로 된 그의 일생이 융해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윤택하고 순결한 진주가 그의 귀중한 생명수 속에 녹아 들어간 것 같았다.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그 마을의 유명한 시인은, 어니스트의 인간과 품격이 자기가 쓴 어느 시보다 더 고아한 시라고 느꼈다. 그는 눈물 어린 눈으로 그 존엄(尊嚴)한 사람을 우러러보았다. 그리고 그 온화하고 다정하고 사려 깊은 얼굴에 백발이 흩어져 있는 모습이야말로 예언자와 성자다운 모습이라고 혼자서 생각하였다. 저쪽 멀리, 그러나 뚜렷이, 넘어가는 태양의 황금빛 속에 높이, 큰 바위 얼굴이 보였다. 그 주위를 둘러싼 흰 구름은 어니스트의 이마를 덮고 있는 백발과도 같았다. 그 광대하고 자비로운 모습은 온 세상을 포옹하는 듯하였다.
그 순간, 어니스트의 얼굴은 그가 말하려던 생각에 일치되어, 자비심이 섞인 장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 시인은 참을 수 없는 충동으로 팔을 높이 들고 외쳤다. “보시오! 보시오! 어니스트 씨야말로 큰 바위 얼굴과 똑같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어니스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안목 있는 시인의 말이 사실인 것을 알았다. 예언은 실현되었다. 그러나 할 말을 다 마친 어니스트는 시인의 팔을 잡고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면서, 아직도 자기보다 더 현명하고 착한 사람이 큰 바위 얼굴 같은 용모를 가지고 쉬 나타나기를 마음속으로 바라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쓴 너대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은 미국 소설을 창시한 주역으로 꼽히는 소설가 중 한 사람으로, 19세기 미국의 초상을 생생하게 그려 내면서 ‘위대한 미국 소설’을 썼다고 평가받는 인물이다.

우리도 그 소년처럼 주님의 형상을 바라보며 일생을 산다면 어느새 주님을 닮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히브리어와 헬라어에는 자주 또는 경우에 따라서 ‘기다리다’는 의미를 가진 많은 단어들이 있다. 그런데 ‘카와’라는 단어는 자주 ‘하나님을 기다림’이라는 능동적인 의미를 가지고 사용된다. 이 단어의 어근은 ‘긴장’과 ‘인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이 오실 때까지 긴장된 기대와 희망이 가득 차서, 그리고 인내의 각오로서 하나님을 기다렸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곧 인간의 희망을 하나님에게 건다는 뜻이다.

대림절이 시작되었다. 주님 탄생의 날을 기다리는 그 마음은 다시 지금 오고 계시는 주님을 기다림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를 지켜야 하고(시 37:34), 인애와 공의를 굳게 지켜야 하는 것이다(호 12:6). 이러한 사람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이며(사 49:31), 하나님께서 그의 힘을 새롭게 해 주실 것이고(사 40:23), 또한 그들을 도우실 것이다(잠 20:22). 하나님은 그를 기다리는 자에게 귀를 기울이시고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시 40:1).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는 땅을 차지할 것이고(시 37:9),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사 25:9 참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이 열매 맺기를 기다리시는 것이다(사 5:2, 7). 신약에서 ‘기다리다’라는 단어는 ‘취하다, 받다’ 등이 능동적인 의미로도 많이 사용되었다(막 15:43; 롬 16:21). 기다리는 사람은 받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양자 될 것’(롬 8:23),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빌 3:20; 막 15:43 등등). 하나님의 인내는 “노아의 날 방주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셨다는 말로 표현되었다. 선지자 이사야는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하고 노래했다. 하나님도 우리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자,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들은 복 있는 자들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효식 목사 (전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부총장)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성경적 오류를 진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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