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오피니언

 
작성일 : 23-05-03 16:11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는 개혁자, 존 낙스

banner


우리는 늘 주변 사람을 의식한다. 나는 요즈음 교회에서 산상수훈을 주제로 설교를 한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은 사람을 의식하는 구제와 기도 그리고 금식의 문제점을 염려하고 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종교적인 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본능적으로 우리의 약점인 사람을 의식하다 보면 무엇인가 과장하여 남에게 자랑하고 싶어 한다. 자랑하고 싶은 것을 숨기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랑의 유혹을 받을 때, 숨기는 것이 신앙의 인격이다. 16세기 종교개혁자 가운데, 독일의 마틴 루터와 프랑스의 존 칼빈에 비해 국내에 덜 알려진 인물이 스코틀랜드의 개혁자 존 낙스이다. 낙스는 개혁주의와 장로주의 신학과 신앙을 대변하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이다.
필자는 1995년 세인트앤드류 대학에 유학을 간 이유가 낙스에 대해 연구하고 싶어서였다. 루터와 칼빈과 달리 낙스는 신학자이기보다는 목회자로 설교자로 교회 개혁의 실제적인 모습을 보여준 개혁자였다. 낙스의 서신을 읽어보면 격동의 시기에 교회 개혁에 대한 낙스의 체온이 전해지는 느낌이 있다. 낙스에 비하면 루터와 칼빈은 비교적 평온한 상황에서 개혁 활동을 하였지만, 낙스는 개혁 초기부터 임종 시까지 일생이 시련과 격동의 시기였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시고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던 요한복음 17장의 한 구절 말씀으로, 1572년 11월 24일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임종을 지켜보던 아내의 음성을 통해 묵상하면서 남아 있는 스코틀랜드 형제들을 위해 기도한 스코틀랜드 개혁자 존 낙스의 기도문이다.
스코틀랜드 개혁가 존 낙스는 1514년 하딩톤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세인트앤드류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로 임명되었다. 사제로 임명된 이후 낙스는 어거스틴의 저술을 접하면서 카톨릭 교리의 모순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러나 낙스의 생애에서 결정적으로 그를 개신교 신앙의 지도자로 변화시킨 사건은 당시 낙스가 존경하던 개신교 지도자인 조지 위샤트의 순교이다. 이 당시 개신교 신앙을 탄압하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추기경 비튼인데, 그가 1546년 5월에 살해되었다. 이 비튼의 살해 혐의가 개신교들에게 주어지자 이로 인한 박해는 이전보다 더 심해 개신교도들은 자신들의 신앙의 자유를 위해 세인트앤드류 성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이때 낙스는 요청에 의하여 이들에게 설교를 하기 위해 그 성의 목회자로 부임한다. 스코틀랜드 정부는 성안의 개신교도들을 탄압하고자 당시 스코틀랜드와 긴밀한 외교 관계를 맺고 있던 프랑스와 협력하여 개신교도들이 피신한 성을 침략하고 개신교도들을 포위하였다. 이것은 카톨릭 교회의 승리를 뜻하며 동시에 개신교도들의 패배를 뜻했다. 이에 낙스를 비롯한 개신교도들은 포로가 되어 19개월 동안 프랑스의 노예선에 감금되어 고된 홍역을 치르게 되었다. 프랑스 노예선의 사역은 그에게 찾아온 두 번째 큰 시련이었지만 이로 인해 그의 소명 의식은 더 확고해졌다. 1550년 스코틀랜드와 유럽의 정세는 개신교 지도자들에게 불리하였으며 이에 개신교 지도자들은 망명 생활을 시작하였다. 지금 우리들에게 알려진 다른 개혁자들 즉 프랑스의 칼빈과 베자, 불링거 등은 이곳 유럽의 망명지(제네바)에서 개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후 낙스는 망명 생활을 마치고 자신의 조국 스코틀랜드로 1559년 귀국하였다. 낙스가 귀국한 후 세인트앤드류 시를 개혁하려고 하자 대주교는 병력을 동원하여 낙스에게 “당신이 만일 앞으로 교회에서 카톨릭 교회를 비판하는 설교를 하면 당신은 죽을 것이다”라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낙스는 어느 누구도 나를 방해할 수는 없다고 단호히 주교의 위협을 무시하면서 “내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면 주님께서 내 생명의 피난처가 되시므로 나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 이후 낙스는 세인트 가일즈 교회에서 목회를 했는데, 그가 그 교회에서 목회할 때 그의 설교는 수백 개의 나팔수가 불어 대는 소리만큼이나 설교를 듣는 이들에게 강한 이미지를 주었다. 낙스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제는 자기의 조국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했다. 이런 이유에서 낙스에게 붙여진 별칭이 ‘하나님의 나팔수’이다.
스코틀랜드의 정세는 1560년에 의회에서 인준한 개신교도들을 위한 신앙 자유의 입법 조치가 회복되면서 한동안 평화로운 시기를 맞이한다. 이를 통해서 볼 때 이제 낙스의 조국 스코틀랜드는 낙스에게 큰 빚을 진 것이었다. 낙스가 자신의 조국을 위해 신앙의 자유를, 즉 종교개혁을 이루었으나 그에게 닥친 육체적 질병은 우리를 비애에 잠기게 한다. 낙스의 죽음은 스코틀랜드만의 슬픔이 아니라 개신교 신앙을 수호하는 모든 이들의 아픔이었다. 1572년 낙스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1572년 11월 24일 에딘버러 집에서 그의 일생을 마쳤다. 낙스의 죽음을 아쉬워하는 에딘버러 사람들이 낙스의 임종 전에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자 교회 옆 목사님의 사택(낙스 하우스)에 모여들었다. 바람이 추운 겨울날 낙스 목사님은 모여든 사람들에게 침대에 누워서 마지막까지 말씀을 들려주었다. 마지막 숨이 끝나기 전 나지막한 소리를 말씀하시면, 창가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창문을 열고 목사님의 말씀을 전언하던 중에 낙스 목사님은 임종을 맞이한다. 낙스는 마지막까지 설교를 하시다가 하나님의 품에 안기신 부러운 하나님 말씀의 나팔수 설교자이셨다. 장례식에 모여든 군중들 앞에서 새 섭정자 모튼은 다음과 같이 애도했다. “여기 이 세상의 사람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한 낙스가 누워 있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Knox Kwon (신앙과 사회문화연구소 소장, 총신대학교 교수)

사회 문제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 (Ⅲ)
사회 문제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 (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