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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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3-07-05 09:27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루터와 바흐의 관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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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가 종교개혁자로서 한국 교회에 알려진 것은 사실이지만, 음악에 대한 루터의 관심은 전문가들이 아니면 잘 모르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터의 음악이 바흐의 음악 세계에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다. 루터는 자신이 생각한 개혁의 사상을 음악으로 표현하였고, 바흐는 200년 전 루터가 사용한 음악을 예술적으로 승화한 것이다. 루터의 음악이 바로크 시대의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루터는 교회 예배에서 음악의 중요성을 주장한 개혁자이다. 자신이 신학자가 안 되었으면 아마 음악가가 되었을 것이라며 본인이 음악에 조예가 깊은 사람임을 말하였다. 루터는 다른 개혁자에 비해서, 플루트와 류트의 연주자면서 동시에 수많은 곡을 작곡한 작곡자로 알려졌다. 루터에게 음악은 사랑 고백이었다. 그의 <음악예찬론, 1530년>에 보면, “나는 음악을 사랑한다. 그리고 음악을 저주하는 열심당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음악은, 사람의 선물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며 영혼을 즐겁게 하고 마귀를 몰아내고 죄 없는 기쁨을 일으키고 이를 통해 분노, 욕정, 교만을 지나가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신학 다음의 맨 첫 번째 자리를 음악에 부여하는데 이는 다윗과 모든 선지자들의 예를 보아 얻은 결론이다. 그들은 자신의 행적을 시와 노래로 전했다. 음악은 평화의 때를 지배한다. 그러므로 견뎌내라. 우리 이후에 오는 인간들은 이 예술과 함께 더욱 나아지리라. 나는 평화 속에 사는 바이에른 영주들을 칭송하는데, 그들이 음악을 육성하기 때문이다. 우리 작센 영주들은 무기와 폭탄을 설교한다.”
루터에게 음악은 예배에서 불가분 중요한 요소가 되었고, 루터의 음악 이해는 예배에서 회중 찬송을 강조한 면이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루터는 다른 개혁자에 비하여 음악에 깊은 관심을 두고, 회중이 부르는 찬송가를 예배에 도입한 사람이다. 루터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음악 형식은 회중 찬미가인 코랄(choral)이었다. 루터 교회의 코랄 작곡은 주로 발터가 담당했다. 루터의 주관 아래 발터가 펴낸 교회 노래 모음집에 코랄 가사 32개와 35개의 선율이 있으며, 4-5성부로 된 편곡 38곡이 수록되었다. 루터가 직접 작곡한 코랄도 우리가 잘 아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포함하여 20편이 있다. 루터가 회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자국어 가사로 된 찬송가를 사용한 점은 독일어 성경 번역과 더불어 16세기 종교개혁에서 대단한 의미를 지닌다. 루터에 의한 회중 찬송가 코랄의 도입은 서양 음악사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루터에게 음악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위대한 선물이며 큰 힘과 선함으로, 구원을 가져오는 즐거움이다. 루터는 신앙을 이성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노래는 감정의 소리이다. 말이 이해적으로 파악되지만 노래하는 목소리에서는 감정적으로 나타난다”로 표현하였다. 루터가 단순히 음악을 예찬만 한 것이 아니라, 그는 예배음악을 정리하였고 회중 찬송가를 도입하고 학교에서 음악을 필수로 채택하도록 하였으며, 목회자들에게도 노래 부르기와 음악 이해를 필수적으로 가르치고 당대의 교회 음악가들에게 적절한 처우를 마련한 사람이었다. 이처럼 루터는 16세기 다른 개혁자에 비하여 음악에 관심이 많았고, 루터의 음악에 대한 이러한 생각이 이후 바흐를 통해 더욱 발전된 근대 음악으로 승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루터의 음악에 영향을 받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태어나자마자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으며, 죽을 때까지 경건한 신앙인으로 교회를 벗어난 적이 없는 독일 루터교 신자였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은 바흐의 삶의 바탕이요 음악의 모티브였다. 바흐는 루터의 음악적 전통을 계승한다. 바흐는 많은 찬송가(코랄)를 편곡해서 칸타타, 오라토리오 모테트를 만들었다. 바흐는 1685년 3월 21일 독일 아이제나흐의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이제나흐는 바흐의 고향이자, 마틴 루터가 어린 시절 공부(1498-1501년)한 곳이며, 독일어 성경을 번역(1521-1522년)한 곳으로 루터와 바흐 모두에게 역사적인 현장이다. 어린 시절 바흐는 1693년-95년까지 라틴어 학교에 다녔다. 어려서 부모가 사망하여 경제적으로 어렵게 자랐으나, 집안에 음악인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어릴 때부터 악기 연주와 작곡을 배울 수 있었다. 오르트루프의 리케움 라틴어 학교와 뤼네부르크의 미하엘 수도원(학교)에서 음악가로서 다양한 경험과 훈련을 하였다. 이외에도 아른슈타트 교회의 오르간 검사관으로 활동도 하였다. 1707년 바흐는 튀링겐 지방의 뮐하우젠에 있는 블라지이 교회에서 일을 하지만, 1708년 6월 25일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당시 1707년 바흐는 두 번째 사촌 누이였던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Maria Barbara Bach)와 결혼하였다. 뮐하우젠 시절부터 시작되어 생의 마지막까지 바흐는 오르간 자문을 맡고 연주와 작곡을 가르치는 개인 레슨 생활을 계속했다. 1708년 바흐는 바이마르 공을 위한 궁정 음악가가 되어 처음에는 오르가니스트로, 후에는 악사장으로 봉직하였다. 1717년에는 쾨텐 안할트에 있는 레오폴트 공 궁정의 음악 감독(Kapellmeister)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바흐는 라이프치히로 이사해서 당시 독일에서 가장 명망 있는 직위인 성 토마스 학교(St Thomas school)의 칸토르(Cantor, 교회음악가, 1723-1740년)와 도시의 음악 감독이 되었다. 바흐의 전 생애 중 음악 활동의 중심은 성 토마스 학교였다. 라이프치히에서 칸토르 겸 음악 감독으로 바흐는 매주 토마스 교회와 니콜라이 교회에서 1년에 60여 회의 칸타타를 연주해야 했다. 1723년 봄 바흐가 성 토마스 칸토르직을 인수하였을 때, 그의 직책은 그가 가졌던 예술적 꿈을 마침내 실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공식적으로 라이프치히 직무를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바흐는 두 라이프치히 주 교회를 위해 자신이 작곡한 음악을 연주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바흐는 매 주일 예배와 교회 축일 예배를 위해 합주음악, 즉 칸타타를 준비하였다. 바흐의 이러한 왕성한 음악 활동은 그가 남긴 유명한 곡으로 알 수 있다. 평생을 너무나 열심히 일한 바흐는 말년의 마지막 2년간 당뇨로 추정되는 병을 앓았으며 시력에도 문제가 생겨 극심한 안구 통증을 겪었다. 바흐의 음악은 기독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 역사가 블로흐(Ernst Bloch, 1918)는 “모차르트에게는 세속적인 자아가 바흐에게는 종교적인 자아가 있다. 모차르트가 생동하는 방식으로 가볍고 자유롭고 활기에 차서 풀린 채 빛나면서 감정들을 울리게 한다면, 바흐는 정확한 방식으로 무겁고 파고들듯이 속박된 채 힘들게 박자를 맞추면서 광채 없이 깊숙이 자아와 자신의 감정목록을 보여준다”라고 하였다.
바흐의 음악의 중심은 교회 음악이었고, 음악의 소재도 복음과 관련되어 있다. 바흐의 일평생 음악 목표는 잘 준비된 교회음악(Eine regurierte Kirchenmusik)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위하여 천부적인 재능에 머무르지 않고 피나는 노력을 하여 최고의 연주자와 작곡가가 되었다. 그리고 기회만 있으면 부지런히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배우려고 하였다. 그는 사람들의 박수나 인기에 연연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위한 수준 높은 작품만을 추구하였다. 그는 자신의 필사 악보에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라는 말의 이니셜(SDG)을 적었다. 이 외에도 “예수여 도우소서”라는 뜻의 J.J.(Jesu Juva) 또는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의미의 I.N.J.(In Nomine Jesu)라는 이니셜을 적어놓았다. 그는 항상 이러한 자세로 작곡하였다. 그는 교회음악의 필사 악보에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SDG)”을 적었지만, 세속음악을 작곡한 후에도 악보에 이것을 기록하였다. 교회음악을 작곡할 때에도, 세속음악을 작곡할 때에도 그에게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의 교회음악과 세속음악은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그 음악적 재료들을 공유하였으며, 바흐 안에서는 교회와 세상이 이론적으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통일되었다. 바흐의 생애와 음악 활동을 통해 알 수 있는 바흐의 음악 영감의 기초는 하나님 말씀이었고, 그의 음악 활동에서 보여준 것처럼 루터가 그의 음악에 영향을 주었고, 그의 음악 활동의 중심은 교회였다는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Knox Kwon (신앙과 사회문화연구소 소장, 총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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