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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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3-11-21 21:38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1560년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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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개신교 교파 중에 가장 대표적인 교파는 장로교일 것이다. 한국 장로교 교단을 보면서 아쉬운 것 중의 하나는 장로교 목사들에게 장로교 역사와 신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점이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필자는 한국의 장로교 상황에서 필요한 2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중의 하나는 국내 신학교에서 초대교회사, 중세교회사, 종교개혁사 그리고 근현대 교회사, 한국 교회사를 가르치고 있는데, 장로교회사와 신조 커리큘럼이 개혁신학과 신앙을 가르치는 교단에서만큼은 중요한 커리큘럼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다른 하나는 장로교의 역사와 신앙고백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교육을 신학교에서 다루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신학교에서 강의 중 칼빈을 장로교 전통의 신학의 계보로 단순하게 강조하거나, 장로교 헌법에 장로교 신조를 기록물로 설명하는 정도로 그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필자는 한국의 장로교 역사와 전통에서 가장 시급한 것이 한국 장로교 신앙고백에 대한 연구라고 본다. 지금까지 상황을 보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한국 장로교 신앙고백의 기준으로 언급하고, 장로교 12신조가 한국 장로교 신조라고 말한다. 이것이 한국 장로교 신앙고백과 신조에 기초가 되고 영향을 준 것은 인정하지만, 위 신앙고백과 신조를 단순히 차용할 것이 아니라 한국 장로교 신앙고백을 다시 정립할 필요가 있다. 필자가 보기에 한국 교회의 위기 중의 하나는 교회에서 분명한 신앙고백이 가르쳐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이제 신학적 그리고 신앙적 기준과 방향성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고민에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에 대한 역사적 이해가 필요하여 이번 호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은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의 고백서 중에서 대표적인 고백서이다. 이 고백서는 영어로 된 최초의 개혁 성향의 신앙고백이며, 스코틀랜드 교회와 세계 장로교회의 헌장으로 불린다. 이 고백서는 1647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나오기까지 스코틀랜드 교회의 표준적인 신조로 사용되었다. 역사적으로 신앙고백은, 니케아 신경과 사도신경 이후 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1530년), 칼빈의 제네바 교회 신앙 문답(1542년), 스코츠 신앙고백(1560년), 도르트의 벨기에 신앙고백(1561년), 독일의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1563년), 영국의 39개 신조(1563), 스위스 제1 신앙고백(1536년)과 스위스 제2 신앙고백(156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및 요리문답(1647년) 등이 대표적인 신앙 규범들이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의 내용은 이미 낙스와 다른 작성자들이 유럽 대륙에서 목회하면서 경험한 것과, 유럽의 루터와 쯔빙글리의 개혁 신학에 기초하여 성경의 중요한 내용을 정리하고 체계화한 개혁주의 입장의 역사적인 신앙고백 헌장이었다. 무엇보다 16세기 개혁신학과 장로교 신조의 근거를 찾는 데 있어서 16세기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는 매우 중요한 문서이다. 이런 면에서 유럽의 장로교 신앙과 개혁 신학을 이해하는 데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을 살펴보는 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보다 80년 전에 이미 작성되었다는 것과 교회 제도적인 면에서 볼 때, 국가의 공적인 장로교회의 구체적인 모습이 스코틀랜드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의 작성 배경을 이해함에 있어, 1560년 이전의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1546년 3월 위샤트가 순교당한 이후, 2달이 지나 추기경 비튼이 개신교도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개신교도들은 세인트안드류성으로 피신했고, 낙스는 여기에서 처음으로 설교를 하면서 목회를 시작하였다. 1547년 7월 스코틀랜드 정부의 요청으로 프랑스 군대가 성을 공격했고, 이로써 성안에 있던 낙스와 개신교들은 잡혀 프랑스 해군 갤리선의 노예 신세가 되었다. 잉글랜드 에드워드 6세의 도움으로 낙스는 석방되어, 이후 영국의 종교개혁을 돕게 되었다. 낙스는 스코틀랜드의 종교적인 상황이 호전되기를 기대하면서 유럽에서 기다렸다. 이 와중에 스코틀랜드 교회 내의 미신과 우상 숭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서약하는 귀족동맹(the Lords of Congregation, 개혁파 귀족으로 구성된 회중 대표)의 요청으로 1559년 낙스가 스코틀랜드로 귀국하였고, 이러한 청원에 대한 대안으로 의회는 개신교 목사들에게 신앙고백 작성을 요청하였다. 이에 4일 만에 낙스를 비롯하여, 세인트안드류 목사인 더글라스(Douglas), 해밀턴 요리문답의 저자이며 부수도원장 윈람(Winram), 법학 박사인 로우(Row), 프란시스파 출신인 윌록(Willok), 로디안 지역의 감독인 스포티우드(Spottiswoode) 등 6명의 존(John)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참여하여 고백을 작성하였다. 이 고백은 성직자, 귀족, 평민으로 구성된 대표에 의하여 1560년 8월 17일에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교리(upon the infallible Word of God)’임을 선포하면서 국회에서 공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이 고백서 채택은 상징적으로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성취를 말하는 역사적인 고백이다. 1560년 스코틀랜드 고백이 채택됨으로 스코틀랜드의 개혁 신앙과 예배가 공식적으로 가능하였다. 이 고백은 7년이 지난 후, 스코틀랜드 국회의 합법적인 인정을 받았다. 스코츠 신앙고백은 채택 이후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유럽 대륙에 소개되었고, 1560년 이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채택되는 1647년까지 스코틀랜드 교회의 공식적인 신앙고백서로 인정을 받았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의 내용은 서문과 25개 조문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서문을 통해, 낙스는 이 고백서를 유럽의 개혁자들이 이해해주기를 원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그 동안 교회의 남용과 위험의 고통을 견디고, 우리가 고백하는 교리를 세상에 알리기를 기대하였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진리를 공격하는 사탄의 도전도 있었으나,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이 고백을 잘 알아주길 바란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의 내용 구조는 사도신경의 구조를 따라서 크게 성부, 성자, 성령, 교회 및 종말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가 사도신경의 구조를 따라, 창조자 하나님 아버지,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 성령, 교회와 국가로 되어 있듯이 스코틀랜드 신앙고백도 크게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25개 항을 세부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성  부 제1조 : 창조자 하나님
제2조~제5조 : 교회의 역사 (아담에서 그리스도까지)
성  자 제6조~제8조 : 그리스도의 위격과 선택
제9조~제11조 : 그리스도의 사역
성  령 제12조~제15조 : 신앙과 선행
교  회 제16조~제17조 : 보편적이고 불가시적인 교회
제18조 : 가시적 교회의 표시들
제19조~제20조 : 성경의 권위
제21조~제23조 : 성례전
제24조 : 국가론
종  말 제25조 : 종말적 완성

<다음 호에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Knox Kwon (신앙과 사회문화연구소 소장, 총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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