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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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3-11-21 21:47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나사렛 예수(Ⅲ)


VI. 육신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제자


베드로는 예수의 고난 예고를 듣고 스승을 붙들고 만류한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 수(首)제자 베드로는 스승에 대한 인간적인 정(情)에 집착하여 고난과 죽음의 길이 자기 스승 예수에게 닥치는 것을 원치 아니했다. 그리고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그 시대 군중들 사이에 만연한 영광의 메시아상에 빠져 있었다. 이들은 영광의 메시아가 다윗 왕국의 후예로 와서 무엇보다 하나님의 백성을 정치적으로 압제하고 있는 로마 제국(帝國)에 대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막강한 힘으로써 로마 군대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에 새로운 신정질서를 세우실 것으로 기대하였다. 이런 관념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가운데서도 나타난다. 이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에 대한 기대를 다음같이 피력하였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눅 24:21). 예수가 부활한 후에도 제자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생각했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 1:6). 군중의 기대란 메시아가 와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로마의 점령군으로부터 해방하고 정치적 해방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을 무력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자들이 당시 열심당원(Zealots)이었다.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킬 때 군중들이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도 예수를 정치적인 메시아로 오해했기 때문이었다. 제자들도 이처럼 당시 유대 군중들에게 편만한 정치적 메시아에 대한 사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돌이키시며 베드로를 꾸짖으신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 수제자 베드로가 스승을 아끼어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을 만류하는 것은 인간적인 정(情)으로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러한 베드로를 “사탄(Σαταν, Satan)”이라고 규정하고 베드로가 자기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 책망하신다. 십자가를 피한다는 것은 인류 구속을 위하여 오신 하나님 아들의 지고한 목적을 파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이러한 꾸짖음은 수(首)제자 베드로가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이다. 예수가 그의 수제자를 꾸짖었다는 내용은 초대교회의 창작품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한데 초대교회가 책임 사도를 그처럼 당혹스러운 방식으로 묘사할 리 없기 때문이다(당혹성 기준). 이 장면은 복음서 저자 요한이 기록한 예수가 정치적으로 강력한 왕이 되기를 회피하는 다른 본문들과 일맥상통하고 있다(요 6:13-14).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예수의 인간성은 “아버지여 원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눅 22:42)라고 기도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의 인성(고난을 피하고자 하는 본성)의 연약함을 그의 신성의 강함으로 이기셨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인성은 고난과 고통 지기를 싫어하고 피하고자 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놓여 있는 죄의 장벽을 깨뜨리는 대속의 일은 죄업에 대한 속량의 제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대속의 일을 위하여 나사렛 예수는 도성(道成)인신(人身)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대속의 제물로 드리는 세례의 잔을 마셔야 한다. 이 결정적 순간(kairos)에 예수의 신성은 인성을 성령의 능력으로 신성에 복종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온전한 순종을 감행하신다. 예수는 유대 종교의 중심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VII. 자기 부정(否定)의 제자직


예수는 제자들에게 제자직의 도리를 가르치신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자기 부정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길이요, 진정한 십자가의 길이다. 예수는 진정한 자기 부정에서 진정한 자기 발견과 획득이 나온다는 사실을 가르치신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 16:25-26). 예수의 가르침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 부정을 통해서 진정하게 자기가 긍정되고 획득된다.

십자가의 길은 인간의 신격화 시도에 역행하는 행동이다. 인간의 신격화는 인간이 자신을 하나님처럼 되고자 한 교만과 불신앙과 불순종에 기인한 것이다. 이에 반하여 십자가의 행동은 자기 신격화를 부정하는 것이며, 자기의 소유와 명예와 권력욕을 부정하는 것이다. 인간이 진흙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자신의 허무성(虛無性)과 허물과 죄책(罪責)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인간의 존재론적 근거이다. 나의 형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인간 존엄성의 발견이요, 인간 소망의 근거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개인의 목숨은 천하보다 귀하다는 생명의 존엄사상을 가르치고 계신다. 인간 개인의 목숨이 천하보다도 귀한 것이기에 하나님이 자기 독생자를 주셔서 대속하셨던 것이다. 진정한 신본주의(true theocentrism)는 인간의 존엄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애(true humanitarianism)를 내포하고 있다. 독일의 실존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예수를 소크라테스, 붓다와 공자와 더불어 인류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네 인물 가운데 하나로 소개하고 올바른 인간상을 추구하는 데 기본적인 의미를 지닌 분으로 보았다. 진정한 신은 영광의 길 아닌 고난의 길을 통하여 자신의 거룩한 구속의 섭리를 실행하신다. 그러므로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하나님의 인간애가 가장 확연히 드러난 지점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구속하기 위하여 자신의 독생자를 대속(代贖, ransom)의 제물로 주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인간애(humanitarianism of God)의 극치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자기희생(self-sacrifice of God)이란 인간이 할 수 없고 참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지고한 사랑의 사건이다. 이 지고한 사랑의 사건이 십자가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신구약 성경은 이 사실을 증언하는 하나님의 인간애 사건을 증언하는 책이다.


<다음 호에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 / 숭실대 명예교수)

1560년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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