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논평_종교다원주의, 인기영합주의 그리고 복음에 합당한 생활
지난 9월 13일 청계 광장에서는 18회를 맞이한 대한민국 종교문화축제가 열렸다. 이 행사는 초창기 종교를 가진 예술인들이 모이는 종교계 행사로 치러졌는데 지금은 종교간의 교류와 일반 시민들이 참여하여 매년 치러지는 행사로 발전하여 문화관광부에서도 후원하고 있다.
올해 행사도 각 종교단체가 부스를 만들고 일반 시민들이 무료로 참여할 수 있는 페이스페인팅이나 티셔츠 프린팅, 묵주 만들기, 단청 만들기 등 주말을 맞아 시내에 나온 시민들이 한번쯤은 참여해 봄직한 행사들로 채워졌다. 마무리 행사인 희망콘서트에서는 문화관광부 장관의 인사말, 종교단체의 음악공연, 대중가수까지도 참여해서 꽤나 볼만한 공연을 마련해 시민들의 참여를 유도 했다.
이러한 행사의 주최측이 밝히는 행사의 의도는 두 가지이다. 첫째 종교간의 상호 이해를 통해 화합하고 분쟁을 줄이자는 것이고, 둘째 더 나아가 시민들과 함께 함으로써 각 종교들을 대중화하는 것이다. 국가기관이 후원하고 있고 각 종교단체의 꽤나 저명한 인사들이 참여하는데다 대중들이 즐길만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어 매우 성대한 느낌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이러한 종교간 교류나 대중으로부터 지지를 받기 위한 종교인들의 노력들은 이제 흔한 일이 되었다. 종교간 이해를 돕기 위한 교류, 체험 행사 등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고, 지난 교황 방한 당시 보여준 행보처럼 대중 영합적인 행보들은 어느 종교나 살아남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 된지 오래된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이러한 일들에 우려를 표명하는 일은 이제 다소간 시대에 뒤떨어진듯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행사들이 종교다원주의에 매몰되어 진정한 진리의 추구라는 종교의 근본 목적을 상실할 수 있다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 또한 종교의 대중화에 치우쳐서 가르침은 없고 즐거움과 휴식만이 있는 저급한 수준의 종교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또한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종교간 교류를 주장하는 이들의 사상적 근원은 종교다원주의에 있다. 다원주의는 어떠한 단일한 제도 또는 제도적 집합체도 지배적인 것은 없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다원주의가 종교에 침투한 결과가 바로 종교다원주의이다. 종교다원주의는 종교간 서로를 인정하고 교류하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다원주의는 매우 그럴듯하다. 현대사회를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서로 다른 차이를 인정하고 화합하며 교류하는 것이 자신의 것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 보다 합리적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다원주의는 그렇다 치더라도 종교다원주의는 그 단어의 구성 자체가 어색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종교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세상의 근원은 무엇인가?’, ‘만사만물의 운행 원리는 무엇인가?’, ‘그 안에 사는 나는 누구이며, 나의 삶의 기준과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들에 답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즉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리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절대적인 것이다. 절대성을 갖추지 않고 상대적이라면 그것은 진리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으며 그저 하나의 가설 또는 이론에 불과하다. 이러한 진리의 확고한 기초 위에 서야하는 것이 종교이기 때문에 종교다원주의라는 것은 어찌 보면 일종의 괴변인 것이다.
절대적이어야 하는 진리에 기초하는 종교가 서로를 인정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진리의 절대성을 포기하는 결과로 해석되고, 절대성이 포기된 것은 진리가 아니며 그렇다면 자기 종교의 주장을 포기하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에도 불구하고 종교간 교류를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원주의가 합리적이라고 받아들이는 대중에게 합리적인 종교로 포장되고 싶어서일 것이다. 현대사회의 종교는 세속화되어 종교로부터 멀어지는 이들을 종교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절체절명의 상태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대한민국 기독교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합리적인 행보를 하려고 한다. 자기주장은 포기한 채 대중을 따르는 이른바 대중추수주의 혹은 대중인기영합주의인 것이다.
초기 교회 시대 우리의 신앙 선배들과 사도들은 대중들의 인기에 영합하려 하지 않고 부활 승천하신 이가 그리스도임을 알리다가 순교하기도 하고 옥에 갇히기도 했다. 사도 바울은 옥중서신을 통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역설한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작정하신대로 그리스도를 보내시므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었다는 확신으로 극한 환란 중에 고난을 받으면서도 주께 순종하며, 영원한 몸으로의 부활할 것에 대한 소망의 인내로 푯대를 향해 살아갈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거룩한 성도의 생활에 대해 이렇게 가르친다. 환란 중에도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이다.
이것이 진정한 종교인 것이다. 종교는 깨달은 진리를 계승하고 전파하는 일에 사명을 두어야 한다. 그러나 진리를 알지 못하고 흔들리는 현대 종교는 ‘너도 나도 알지 못하니 그저 같이 하자’ 그리고 ‘대중들에게 좋은 소리 듣도록 노력하자’라고 외치고만 있는 듯하다.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를 지켜 승리하고자 하는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고난 중에서도 순종하며 영원한 부활을 소망하고 사는 생활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복음에 합당한 생활로 여긴 초대교회의 사도들처럼, 오늘도 누가 무어라 하든 성도들이 타협할 수 없는 진리를 지키기 위해 담대히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성령께서 이러한 삶으로 인도하시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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