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오피니언

 
작성일 : 09-06-30 17:35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바른성경과 개역성경 무엇이 다른가?(3)

3. 바른 신학


바른 신학이라 함은 한국 교회의 전통적인 보수 복음주의 신학을 의미한다. 성경의 영감과 무오의 교리를 믿으며 사도신경을 믿음의 근간으로 삼는 신학이다.


1) 하나님의 이름에 대하여

(1)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바른성경)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개역성경)

“여호와, 우리 하나님”(바른성경)
“우리 하나님, 여호와”(개역성경)

하나님의 이름에 대하여 학자들 간에 이견이 많다. 히브리어 요드바브 헤 바브(hwhy) 네 글자를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도나이” 혹은 “하셈”으로 읽는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마소라 학자들이 음역을 따라 “에호와” 혹은 Jehovah 로 읽어 왔다. 그리고 우리 나라 사람들도 이를 따라 “여호와”로 불렀다. 그러나 최근에 “아도나이”를 음역하여 “주”(The Lord)로 번역하였고, 한국의 표준 새번역도 “주”로 번역했다. 근래의 학자들은 히브리어 동사 하야(hyh)의 사역형을 따라 생명을 있게 하는자 곧 창조주라는 의미로 야베(Yahweh) 라고 음역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정확한 하나님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바른 성경은 오랫동안 한국 성도들에 입에 토착화된 “여호와”라는 이름을 쓰기로 했다.
또한 여호와(hwhy)와 엘로힘(<yhla)이 같이 쓰일 경우 개역성경은 예외없이 “하나님, 여호와”로 번역하였다. 따라서 아도나이 엘로헤 이스라엘(larvy yhla hwhy)라고 할 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바른성경에서는 히브리어의 어법이나 다른 서양의 역본을 따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바꾸었다.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 대신에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혹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 등으로 고쳤
다.

(2) “나는 나이다”(hyha rva hyha)

출애굽기 3:14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나이다.”라고 대답하시고, 또 ‘나이신 그분이 너희에게 나를 보내셨다.’고 이같이 너는 이스라엘족속들에게 말하라고 말씀하셨다.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개역성경)

학자들은 히브리어 구절 Ehyeh-Asher-Ehyeh (hyha rva hyha)의 번역을 두고 많은 논난을 벌여왔다. 대체적으로 세가지 주장이 있다.
첫째는 불가성을 나타내는 번역이다. 이 경우 “나는 나이다” 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나이다”는 말은 내가 누구인지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할 대상이 아니다. 나는 어떤 이름으로도 표현될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이 경우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을 감추고 계신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감추인 이름은 신약에 와서 예수께서 자신에 대하여 “나는 ...이다”(evgw, eivmi ...,  요 6:35; 6:48 8:12; 9:5; 10:9, 14; 11:25; 14:6;15:1)라는 자기 선언에서 보충 계시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는 존재론적인 번역이다. “나는 실존하는 자이다”(I Am That I Am, I Am Who I Am) 혹은 “나는 내가 될 것이다.”(I Will Be What I Will Be) 등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개역성경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번역하는 경우도 바로 이 실존론적인 번역이다. 하나님께서 누구에 의해서 창조되거나 어디에서 유출된 존재가 아니 태초부터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라는 의미이다. 셋째로는 언약적 번역이다. “나와 함께 있는 나는 분명히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번역할 수 있는 데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이라는 언약을 확인하는 의미를 담은 번역이다. 그러나 실존적  번역이나 언약적 번역들은 Ehyeh-Asher-Ehyeh (hyha rva hyha)를  정확하게 번역한 것이라고 볼 수 없고 창조나 언약적인 의미에 무게를 둔 번역이다. 따라서 개역성경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번역은 히브리어구와는 거리가 멀다.
칠십인역에서 Ehyeh-Asher-Ehyeh (hyha rva hyha)를 evgw, eivmi o` w;n 으로 번역하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나는 .... 이다” 라는 공식은 분명 구약의 이 구절을 염두에 둔 자기 소개요 자기 주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3) 하나님께 대한 존칭 (창세기 1:3)


“하나님께서 ‘빛이 있어라’ 말씀하시니” (바른성경)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개역성경)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하시니” (개역개정)


하나님에 대하여는 존칭어를 사용하였다. 개역성경에서 “하나님이 가라사대”를 현대어법에 맞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로 현대어법에 맞게 존칭어로 번역 하였다.
“여호와가”를 “여호와께서”로  “하난님이”를 “하나님께서”로
“주가”를 “주님이”  “예수가”를  “예수님이” 혹은 “예수께서”로


(4) 하나님의 이름 음역 (창세기 16:13)

“하갈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주님은 엘로이이시다’라고 불렀으니, 이는 그 여자가 말하기를 ‘참으로 내가 여기서 나를 살펴보시는 분을 뵈었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바른성경)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개역성경)

개역성경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설명절에서도 반복하여 어법상맞지 않다. 바른성경대로 여호와의 이름을 “엘로이”라고 부르고 그 설명을 “나를 살펴보시는 분”이라고 번역해야 옳다. 이러한 예는 호 2:16의 경우 개역의 “내 남편”은 이쉬(yva)로 “내 바알”은 바알리(ylub)라고 음역을 써야 옳다.

2) 인명과 지명에 대하여 

애굽→ 이집트, 다메섹→다마스쿠스, 구스→에티오피아, 바사→페르시아 등.
평지→ 쉐펠라 (수 9:1;11:2; 12:8)
남방→ 네게브 (수 10:4; 삿 1:9; 대하 28:18; 슥 7:7)

성경의 인명과 지명은 한국교회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음역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나  일부 지명은 현재 중고등학교 교과서의 예를 따름으로 독자들에게 역사적 현실감을 갖게 하였다. 개역 성경에서 “평지”라고 번역하고 있는 "쉐펠라"(hlpv)도 고유명사의 원음대로 쉐펠라로 바꿨으며(수 9:1; 11:2; 12:8 등),“남방”으로 번역하고 있는 “네게브”도 원음대로 네게브로 바꿨다(수 10:40; 삿 1:9; 대하 28:18; 슥 7:7).


3) 부활신앙과 소망

(1) 창세기 22:5

“나와 아이는 저기로 가서 우리가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겠다.”(바른 성경)

“내가 이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개역성경)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개역개정)

개역성경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예배를 혼자 하는지 둘이서 하는 지, 혹은 예배 후 아브라함이 혼자 돌아오는지 아이와 같이 돌아오는지 분명하지 않아 마치 아브라함 혼자 돌아오는 것 같이 번역되어 있다. 이것은 창 21:12의 “이삭을 통해서 태어나야 네 자손이라 일컫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이나 히 11:17-19의 말씀대로 아브라함의 부활 신앙과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에 대한 믿음을 반영하는 중요한 구절이다. 바른 성경은 원문이 강조하는 대로 “우리가”를 두 번 번역하여 개역의 오류를 바로 잡았다.

(2) 욥기 19:26

“이것이 썩은 후에 나는 육체로부터 하나님을 볼 것이다.”(바른성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개역성경)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개역개정)

원문에서는 명확하게 “미 바살리”(yrcbm, 내 육체에서부터)라고 하고 있는데, 왜 부활한 몸으로 하나님을 보리라는 말씀을 왜곡했는지? 의문이다.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부활과 상관없다. 단지 죽어서 주님을 만난다는 의미에 불과하다.

(3) 욥기 13:15

“주께서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분을 소망하니,....”(바른성경)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개역성경)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개역개정 4판)

원문은 비평 각주에 많은 사본에“로”(wl, 그에게, 혹은 그 안에)로 읽고 있다고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개역성경은 유독 부정적인 본문을 선택하고 있다. 유대인 성경에서도 바른성경의 번역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간파하고 개역개정은 각주에 “또는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니’”라고 수정하고 있다.


4) 하나님의 섭리

룻기 2:3

“이삭을 주웠는 데, 뜻밖에 그 여자가 간곳은 ... ”(바른 성경)
“이삭을 줍는 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개역 성경)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 (개역 개정)
“그가 간 곳은 우연히도, 엘리멜렉과 ...”(새번역)

히브리어구 바이케르 미크레하(hrqm rqyw)를 번역하는 데 있어서 룻이 전혀 의도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는 데 보아스의 밭에 이르게 된 상황에 대하여 우연이라 번역을 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우리 기독교와는 상반된다. 따라서 바른 성경은 “뜻밖에”라고 번역하였으며, NIV도 이 점을 충분히 의식하여 "판명된 대로“(As it turn out)라고 결과적으로 번역하고 있다. 인생의 생사화복에 우연이란 없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만 있을 뿐이지 우연이란 없다. 


5) 귀신론

(1) 요한계시록 12:9

“그 큰 용,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바른성경)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개역성경)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 하며”(개역개정 4판)

“더러운 영”은 헬라어 프뉴마 아카르토스 (pneu,ma avkaqa,rtoj, unclean spirit)라는 말이며, 이 본문과 병행하는 본문들(마 8:28- 34; 눅 8:26-39)에서 조차도 “귀신들렸다” (다이모니조마이)는 표현의 원래 단어인, 다이모니온이라는 말은 원래 “demon, devils, evil spirit”라는 말이다. 이 단어가 사전에서 “귀신”이라는 말로 번역되면서 한국에서 귀신론이 시작되었고, 귀신은 성경이 인정하는 것처럼 되었다. 그러나 인간이 죽어서 귀신이 되고 120년 동안 세상에 돌아다니는 귀신론의 근거 역시 이러한 번역에서 근거를 주고 있다. 그러나 성경적인“다이모니온”은 사탄의 부하들이다. 악한 영들이라는 의미에서 보아야 한다. 다른 본문들을 연결해 보면 아래와 같다.
 

(2) 마가복음 5:2

“곧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무덤들 사이에서 나와 예수님을 만났다.”(바른 성경)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개역 성경)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개역개정 4판)

여기서 바른 성경과 다른 성경의 큰 차이는 없다. 그러나 분명히 “마귀”는 성경들이 동일하게 디아볼로스를 번역한 말이고, “사탄” 혹 “사단”은 사타나스를 번역한 것이다. 성경에서 사탄에게만 이 단어를 사용하고 그 추종하는 영들에게는 “다이모니온”을 쓰고 있다. 따라서 개역이나, 개역개정이 “귀신”이라고 번역한 “다이모니온”은 잘못된 것이다. 또 다른 근거는 구약의 예이다. 389번의 구약에서 영(루아흐)이라고 사용된 용례에서 단 한번도 귀신이 나타나지 않는다. 단 여호와의 부리시는 악 영(루아흐 라아)이라는 표현들은 종종 나타나지만(삿 9:23; 삼상 16:14 등) 귀신은 구약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귀신이라는 단어가 있더라도, 성경은 사탄의 후예가 아닌 독자적인 사람들이 죽어서 존재하는 영으로서가 아니라, 사탄의 추종자인 악한 영이기 때문에 다이모니온은 “악한 영들”이라고 바른 성경은 번역하므로 미신적인 귀신이란 용어를 성경에서 완전히 제거하였다.
이것은 바른성경이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잘못 인식되어온 귀신 사상을 바로잡을 것이라 믿어진다.

6) 인간론

(1)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바른성경)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개역, 개역개정)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표준새번역)

개역 성경에서 히브리어 니쉬마트 하임(<yyj tmvn)을 “생기”로 번역하고 있는 데 이는 생명의 기운이나 생명의 호흡 등으로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생명의 기운보다는 생명의 호흡이라는 말이 원어에 더 가깝다. 또한 개역에서 “생령”이라고 번역하는 내패쉬 하야(hyh vpn)도 "생령"이라는 말보다는 “생명체”(living being), 혹은 “살아있는 생명체”라고 해야 옳다. 생령이라고 번역하기 때문에 사람을 영적인 존재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으나 내패쉬 하야(hyh vpn)는 짐승들에게도 사용되고 있다(창 1:20,24,30; 9:12,15, 16 등). 이 경우 바른성경은 “생물”로 번역하였다. 표준새번역은 “생명체”로 바꾸었다. 따라서 개역은 사람이 생명의 호흡을 받아“생령”이라는 어떤 특별한 영적인 존재가 된 것처럼 번역하여 인간 존재의 구성 요소에 많은 착오를 갖게 한다.

(2) 열왕기하 2:9 (참조 2:15) 

“...선생님의 영을 저에게 갑절로 임하게 해주십시오.”(바른 성경)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개역성경)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개역개정 4판)

원문에서는 베루아하카(:jwrb)라고 번역한다. “영”은 하나님의 영이고, 그 영이 엘리야에게 있는 것이다. 개역은 이러한 신학적인 문제를 “영감”이라고 번역함으로 사람마다 “영감”이 몇 배나 다르게 역사하는 것처럼, 인간론에 문제를 준다. 그러나 개정은 더 문제가 있다. 원문에 루아흐 카도시(vdq jwr, 성령)으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 “성령”으로 번역하면 안된다. “영”이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성령이 하시는 역사”라는 말은 해석이지, 본문에 있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심각한 해석학자의 추가적 내용이다. 15절도 동일한 문제가 있다.

7) 성령론 및 성령의 사역


(1) 스가랴 12:10 전반절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에 사는 주민들에게 은총과 애원하는 하는 영을 부어 줄 것이다.”(바른 성경)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개역 성경)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개역개정 4판)


개역과 개역개정은 “심령”이라고 번역해 사람의 마음인 것처럼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은 성령을 부어주시는 약속으로 보아야 한다. 주석가들도 대부분 이 의견을 지지하고 있다.

(2) 요엘 2:28

“...내 영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 줄 것이니, 너희 자녀들은 예언하고”(바른 성경)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개역 성경)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개역개정 4판)

여기서 개역과 개역개정은 성령의 사역에 대한 오해를 줄 수 있다. 성령님의 사역은 예언하게 하는 사역(abn, prophesy), 곧 “장래 일을 말하는 것”으로만 말할 수 없다. 히브리어 나바(abn)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다”(즉 설교와 말씀 전파), 혹은 “대언하다”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항상 장래의 일만을 대언하라고 하시지 않는다. 과거의 일이나 현재의 일도 대언하라고 하신다.  이것은 또한 개역과 개역개정 자체의 번역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즉 사도행전 2:17은 구약성경을 인용한 것인데 “예언할 것이다”라고 개역과 개역개정 모두 다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신, 구약의 성령의 사역을 일치시키지 않음으로써 마치 구약에서는 성령님이 장래 일을 말씀하는 사역을 하시는 것으로 오해를 줄 수 있다. 예언이라는 말도 100%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지만, 예언이 그래도 원문에 더 가깝다. 비슷한 예로 신약에도 성령의 사역과 연관된 단어가 있다.

(3)  에베소서 1:17

“지혜와 계시의 영.”(바른 성경)
“지혜와 계시의 정신.”(개역성경)
“지혜와 계시의 영.”(개역개정 4판)

개역은 정신으로 번역했지만 결국 개역개정에 가서는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성령에 대한 수식 “지혜와 계시”인 것이다. 이것은 성령님에 관련된 설명이며 결코 우리에게 어떤 정신을 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성령의 사역과 관련된 단어들이 바르게 교정되었다.

(4) 스바냐 3:17

“여호와 너의 하나님께서 네 가운데 계시니, 그분은 구원을 베푸실 용사이시며, 너 때문에 기뻐서 즐거워하시고, 그의 사랑으로 잠잠하시며, 너 때문에 큰 노래로 기뻐하실 것이다.”할 것이다.(바른성경)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개역성경)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개역개정 4판)

이 단락은 너무나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원문은 “기보르”(rwbg, 용사)이며, 동사형 “즐거워하다”(cyc, rejoice), “잠잠하다”(vrj,be silent), “기뻐하다”(lyg, rejoice)라는 형태와 전치사구로 연결되어 있다. 2번째 “그의 사랑으로 잠잠하시며” 혹 “너를 잠잠케 하시며,”“너를 새롭게 하시며”(비평 각주) 등으로 번역될 수 있지만, 개역성경은 동사와 전치사 구를 바꾸어 놓았다. 의미를 완전히 다르게 전달하였다.

(5) 시편 51:10

“...견고한 영을 새롭게 하여 주소서.”(바른 성경)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개역성경)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개역개정 4판)

개역은 정직한 영을 각주에 견고한 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나중에 추가하였지만, 원문에는 나콘 루아흐(jwr /wkn, 견고한 영)이라는 뜻으로 적혀 있다. 성령이 죄를 이기는 사역을 약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6) 사사기 6:34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을 두르시니...”(바른성경)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개역성경)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개역개정 4판)


라바쉬(vbl)는 “옷 입는다”는 말이다. 여기서 기드온을 성령으로 “옷 입혔다” 혹은 “두르다”는 의미이다. “강림하다”는 하야(hyh)를 주로 번역한 것이나 원래의 의미는 “있다”(be)이다. 따라서 “임하다”고 번역하는 것은 정확한 의미가 아니다.

(7) 사사기 14:6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강하게 임하시니,”(바른성경)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개역성경)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개역개정 4판)


개역과 개역개정은 원문에 정확한 원칙이 없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차라흐(jrx, rush 돌진하다)라는 어휘를“강하게 임하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크게 감동하였다”는 말은 13:25에 개역이 번역한대로 파암(mup, thrust, impel)이라는 단어가 더 적절하다. 따라서 개역은 이 두 단어를 구분이 없이 혼용하여 번역하고 있다(13:25 mup과 14:6 jrx). 그러나 개역개정은 이 구절에서 개역의 오류를 수정했다고 볼 수 있으나, 사사기 14:19 가서는 “jrx, 강하게 임하다”라는 의미를“갑자기 임하였다”라고 번역함으로 하야(hyh, 임하다)의 의미로 번역하여 오해를 주며 14:6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8. 하나님의 사랑


(1) 호세아 1:2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와 음란한 자녀들을 취하라.”(바른성경)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개역성경)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개역개정 4판)

호세아에 대한 해석은 문제는 신학적인 문제이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가 하는 문제이다. 호세아는 단순하게 음란한 여자와 결혼하였다고만 볼 수 없다. 이것은 주석들이 이미 문제를 제기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원문상에도 보면 레크 카흐 레카 에쉣 제누님 베얄레데 제누님(<ynwnz ydlyw <ynwnz tva 'l jq 'l) 동사는 “취하라”(jql)라는 말 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낳으라”라는 말은 없다.  동사 라카흐(jql)의 목적어는 두 개의 어구“음란한 아내”와 “음란한 자식”이다. 라카흐(jql)가 성인 여자를 목적어로 사용할 때는 아내를 “삼다” 혹은 “...와 결혼하다”는 의미이지만 어린 아이를 목적어로 사용할 때는 “입양하다”의 의미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 호세아는 음란한 여자, 고멜을 아내로 삼고, 고멜이 음행으로 낳은 자식들을 자기의 자식으로 입양하라는 의미이다. 음란한 아내를 얻었다고 해서 그가 낳은 자식이 음란한 자식이라고 말할 수 없다. 호세아와 고멜이 결혼해서 낳은 자식은 호세아의 정상적인 자식이다. 고멜은 호세아와 결혼하여 아들 이스르엘(4절)과 로암미(9절), 그리고 딸 로루하마(6절)로 2남 1녀를 낳는다. 그러나 2:1에 여호와께서 “너희 자매들”이라고 복수로 말씀하시는 것을 염두에 두면 고멜은 적어도 딸이 1명 이상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호세아는 창기와 결혼한 것도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자식들이 딸린 창기와 결혼한다는 것은 더욱 감당하기 힘든 일일 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에서는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하나님의 명령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호세아는 여호와를 은유하는 것이며, 여호와께서 바로 창기, 고멜과 같은 이스라엘을 구출하여 사랑하고 결혼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것이다.


9) 예수 그리스도와 그 사역

(1) 스가랴 12:10 하반절

“그들이 나, 곧 그들이 찌른 자를 바라보게 될 것이니...”(바른성경)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개역)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개역개정 4판)

“나”는 찔림 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다. 개역과 개역개정은 문법적으로 정확한 의미를 주지 못한다.

(2) 이사야 53:12

“범죄자를 위해 중재하였다.”(바른성경)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개역성경)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개역개정 4판)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한 사역은 죄인들을 위한 중재 사역이다. 죄를 그리스도께서 친히 담당하시고 다 해결하시는 것이다. 개역이나, 개역개정에서 “기도하였다”라고 번역한 단어는 파가아(ugp, 만나다, 떨어지다, 돌아보다, 중재하다)라는 뜻이다. 물론 간청하다라는 의미가 있지만 단순히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해서 여기서 기도한 것으로 볼 수없다. 오히려 본 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를 위해 중재하신다(참 히 12:24)라는 의미로 해석할 때 그리스도의 사역을 더 드러내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포괄적으로 드러내는 의미로 적절하다. 물론 히브리서 7:25에서는 그리스도의 중보기도 사역을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사용된 단어는 엔튜그카노(evntugca,nw, plead, appeal)라는 단어로, 이사야 53:12의 헬라어 역본 70인 역에서도 “담당하다”(parado,qwmi, hand over)로 번역하는 것을 보아도 단순한 중보 기도사역이라기 보다는 죄를 담당하는 중재사역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옳다고 보인다.


10) 구원론

(1) 요한복음 5:24; 6:47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지고 있고”(바른성경)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개역성경)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개역개정 4판)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누린다. 이것은 과거의 상태도 중요하지만, 현재적인 영생(zwh.n aivw,nion)을 가지고 있다. 즉 구원은 과거의 일어난 사건과 현재에 경험되는 것이 다 강조되어야 한다.


11) 성경론

(1) 여호수아 1:7

“..좌로나 우로나 말씀에서 떠나지 마라...”(바른성경)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개역성경)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개역개정 4판)


개역과 개역개정은 이 구절을 “성경 말씀에서 떠나지 마라는 의미”로 전혀 해석하고 있지 않다. 원문은 알 타수르 밈메누 야민 우셰몰(lwamvw /ymy wnmm rwst-la)이다. 직역하면 “그것으로부터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 떠나지 마라.”이다. 여기서 “그것”은 말씀을 가리킨다. 따라서 개역과 개역개정은 마치 성경이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도를 가르치는듯한 오해를 준다. 여호수아는“말씀에서부터”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떠나서는 안되는 것이다.

(2) 아모스 8:11

“...여호와의 말씀을 들음에 대한 기근이다.(바른성경)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개역성경)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개역개정 4판)


이 말씀을 정확하게 해석하지 않음으로 종말에는 성경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 있을 것처럼 이해한다. 그러나 백성들은 말씀을 많이 들었다. 원문은 임 리스모아 에트 디브레이 아도나이(yrbd ta umvl-<a
hwhy)라고 하여 “들음에 대한 기근”이라고 정확하게 말씀한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로 말씀을 듣는 자에 대한 문제를 말하고 있다. 즉 말씀이 있어도 그 말씀에 대한 자세로 인한 기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12. 기복 신앙 

(1) 열왕기상 3:4 (참조: 역대하 1:6)

“...솔로몬이 그 제단에서 일천 번제물을 드렸다”(바른성경)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개역성경)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개역개정 4판)


한국 교회에 큰 문제가 된 것이 이 본문이다. 마치 솔로몬이 1000일 동안 번제를 드렸다든지, 혹은 1000일 동안 번제물을 드렸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어 에렙 오로트(twlu [la)는 “일천의 번제물”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주석가들은 8일 만에 이 제사를 마쳤으며, 일천 제물을 드린 것으로 본다. 개역 역시 역대하 1:6에서는 “일천 희생”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개역개정은 “천 마리 희생”([la twlu)으로 풀어쓰고 있다. 사실상 원문은 같은 단어들이다. 솔로몬이 “천마리 희생” 혹은 “일천 번제물”이라고 바르게 번역해야 한다. 그래야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려서 지혜와 부귀를 얻었으므로 우리도 그렇게 해야 솔로몬과 같은 부귀공명을 얻을 수 있다는 식의 주고 받기적인 기복적인 신앙에서 벗어날 수 있다.


13) 예배

(1)  요한복음 4:24

“그분께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바른성경)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개역성경)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개역개정 4판)


개역개정도 이미 개역이 틀린 것을 인정하고 수정하였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형성

바른성경과 개역성경 무엇이 다른가?(4)
바른성경과 개역성경 무엇이 다른가?(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