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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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3-02-08 20:1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세속 정치의 노예에서 벗어나기


29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30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요 14:29-31)
현재 우리 사회는 밤낮 가리지 않고 온갖 매체를 이용해 서로 물고 뜯는 두 집단이 존재한다. 수구 세력과 진보 세력의 대립은 날이 갈수록 한국 사회를 멍들게 한다.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도 멍들게 한다. 목회자인지 정치꾼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자들이 많다. 툭하면 정치적 주제를 꺼내 자신이 정해놓은 ‘나쁜 놈’을 하나님의 이름까지 사용하며 저주를 퍼붓는다. 수많은 신도들은 무엇이 진실인지도 모른 채 목회자의 왜곡된 판단에 의해 그리고 유튜브 몇 개로 미천한 정신세계마저 탈탈 털려버린다. 태극기와 성조기 그리고 이스라엘 국기까지 흔들며 도대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하루 일당의 금전을 받고 하는 행태라면 답은 명확할 것이다. 돈 받고 남을 욕하는 짓이라면 돈을 받았으니 돈을 준 사람의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다. 물론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신도들도 많다. 문제의 본질은 정치판의 참여 여부가 아니라 신앙과 관련해 무슨 근거로 그런 행동을 하고 어떤 동기로 상대방을 비난하고 저주해야 하는지 돌아볼 여지가 점점 사라지고 극단으로 치닫는 행태들이 날이 갈수록 교회 내에서도 더 극성을 부린다는 점이다. 이쪽으로 가든 저쪽으로 가든 그보다 저 중요한 것은 복음 진리를 믿고 전하는 일이 사명인 성도들이 정치판의 꾼들에 의해 농락당하는 처지가 안타깝고 답답하다. 다시 우리는 진리의 말씀부터 깊이 묵상하고 기도해야 함을 강조하고자 한다.
빛과 어둠, 환란과 평안의 역사를 모두 섭리(사 45:7)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절대주권자이시다. 그리고 이는  역사를 이해하는 기독교 세계관의 근본 명제다. 당연히 성도들이 믿고 있는 바이며 전해야 할 복음의 핵심 주제다. 특히 왜곡된 역사관이나 편중된 역사관 혹은 있지도 않은 거짓을 만들어 타인 탓을 하고 용서와 화해보다 죽일 듯한 증오심의 노예가 된 자들에게  전해야 할 복음의 핵심이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광장의 중간 지대 곧 화해와 통합의 출구 마련은 이 시대 복음 전도자의 사명이다. 정치적 발언부터 삼가고 진리의 말씀을 묵상하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정하신 뜻에 담긴 의미를 숙고해야 한다. 나아가 좋은 상황이든 험한 상황이든 편안한 여건이건 불편한 자리이건 반드시 전해야 하는 것은 바른 복음 진리다. 아직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이 믿어지지 않아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작은 허물도 마치 천벌을 받아야 하는 죄인으로 몰아세우는 악다구니의 노예가 된 지체들이 이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역사 해석의 정답지는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다. 그가 가르치신 말씀에 현실 역사 해석의 명답지가 있다. 결론부터 다시 강조하면, 그리스도가 수없이 반복하며 강조한 영원히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주권적 섭리에 대한 확신이 그 정답이다. 물론 답지는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 쓸 수 없다. 전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과 은총만이 확신의 유일한 원천이다. 자기 몸을 불살라 버린다고 해도 애국자나 열사로는 추앙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감동했는지는 우리의 판단과 소관이 될 수 없다.(고전 13:3 참조). 사회적 대립 상황, 교회의 분열 상황이 사악한 정치꾼들의 먹잇감이 되어 우리의 눈에 더 극단으로 치닫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폭탄 테러를 자행할 수는 없다. 그것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와 현실 역사에 대한 심판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 몸에 폭탄을 장착할 수는 없다.
이러한 난제와 고민에 휩싸일수록 심령의 자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와 그의 가르침을 성경에서 찾는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매일 아침 받았던 하늘의 양식이 이제는 항상 우리 손 안에 있다. 영적으로 굶주려 있음에도 ‘유튜브 쇼츠’를 먼저 터치하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도입부 말씀을 보면)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권력자 빌라도가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고 로마 군병들에 의해 참혹한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일을 마주하신다. 그리고 이 사건의 핵심을 말씀하신다.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실 일을 미리 말씀하신 것은 그 일이 성취될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짐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아버지 하나님의 정하신 뜻으로 역사적 사건을 받아들인다면, 본능적으로 몸은 자기중심적으로 사건을 판단하겠지만, 진리의 영이 주관하면 로마 제국의 총독 빌라도도 로마 군병도 사악한 유대인들도 배신자 가룟 유다와 베드로도 궁극적 원망의 대상은 될 수 없을 것이다. 세상 권력이 모두 합세하여 그 무서운 십자가에 그리스도를 죽이는 형국에 대해 그리스도는 이 일이 전적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정하신 뜻이 이루어진다고 명쾌하게 일러주신다. (30절에 보면) 분명히 자신의 몸은 ‘세상 임금’이 십자가에 달게 하지만 그것이 사건의 원천이 아니라고 하신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30 그러나 저[세상 임금-필자 주]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현실 역사를 기독교 세계관으로 해석할 때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절대주권적 통치 그리고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은총은 필수 요소다. 하나님의 통치를 깨달을 수 없는 역사 해석은 결국 증오와 원한, 보복과 책임 전가로 끝난다. 특히 세상 권력을, 인간의 판단이나 선입견 혹은 이해관계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이루기 위한 신적 섭리의 도구로 현실을 통치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 자신에게 가족에게 내 편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손해가 된다고 하더라도 나아가 그 세상 권력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짓밟는다고 하더라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주권적 통치는 변함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진리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절대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상식이 범접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오직 은혜가 된다. 자신의 고향, 여호와 이름이 있는 곳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패망 당하고 수십만의 동족들이 처참하게 살해당할 것을 알고 있던 바울 사도는 준엄한 하나님의 역사 섭리 앞에서 다음과 같이 로마 교회에 편지를 보낸다. 이러한 바울의 고백을 몇 개의 유튜브에 현혹 당해 상대방을 증오하는 심정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수구와 진보의 딜레마에서 자유로운 길은 오직 성경진리에 대한 명확한 이해밖에 없음을 다시 확인한다.

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 2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3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4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5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롬 13:1-5); 13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16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17 뭇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벧전 2: 13-17)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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