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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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4-02-06 21:00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기도의 정수(精髓), 오직 여호와 경외!


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8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 붙는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 12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수하심을 나로 보게 하옵소서 13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렘 20장 7-9, 12-13절/강조는 필자에 의함)


주전 586년은 오래전 여호와의 언약(레 26:14-33; 신 28:15-68; 신 29:14-21; 신 30:1,17-18; 수 8:34; 수 23:14-16)대로 남쪽 유다 나라가 바벨론제국에게 멸망당한 시기다. 20여 년 동안 바벨론은 3차에 걸쳐 예루살렘을 침공한다. 그때 유다 왕과 신하들 그리고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선지자들은 애굽에 의존하면서 바벨론의 침공을 피하고자 했다. 하지만 여호와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보내 유다 멸망은 결코 피할 수 없다는 사실과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임을 거듭거듭 알린다. 하지만 유다는 그렇게 알려주는 예레미야를 오히려 핍박하며 항복을 권유하는 것에 대해 바벨론제국의 첩자처럼 취급한다.

여호와가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신 당시 유다 멸망의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 산당을 건축하고 왕의 아들들을 바알에게 번제로 불살랐기 때문이다. 자녀를 이방신을 위한 제물로 바친 곳은 예루살렘 남쪽에 위치한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였는데 이곳을 유다 백성이 바벨론제국에게 사로잡혀 ‘살륙당하는 골짜기’로 삼겠다는 사실을 예레미야가 전한다.(렘 19:5-6 참조) 나아가 그 시체는 공중의 새와 땅 짐승의 밥이 되게 하고 바벨론제국이 성을 오랫동안 포위함으로 굶주려 급기야 아들의 고기, 딸의 고기, 친구의 고기를 먹게 된다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예언을 한다.(렘 19:7-9; 레 26:29; 신 28:53; 사 9:20; 애 2:20; 애 4:20; 겔 5:10 참조)

앞에서 인용한 말씀을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러한 끔찍한 예언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전달했기 때문에 왕과 신하들과 제사장들에게 치욕과 모욕을 당한다. 여호와의 약속을 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은 도저히 인간이 받아낼 수 없는 내용이었다. 유다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물론이고 그 어떤 신하도 예레미야의 예언을 결코 수긍할 수 없었다. 예레미야에게 돌아오는 것은 위협과 매질이었다. 예레미야 자신도 여호와 앞에서 그러한 예언을 입에 담고 싶지 않다고 한탄한다. 자기 나라의 멸망을 누구인들 자기 소신으로 여기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예레미야는 여호와가 자신의 정한 뜻을 알리도록 보낸 선지자이므로 자기 뜻을 전할 수 없도록 하신다. 여호와의 정한 뜻을 전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렇게 전하므로 닥치는 고난과 모멸과 치욕도 받지 않을 수 없다. 앞의 본문 중 20장 9절에 보면 여호와의 뜻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엄중하고 엄격하며 인간의 의지와 무관한 일인지 선지자의 고백에 담겨 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여호와의 정한 뜻을 전하면 유다 권력의 핍박이 따르고, 여호와의 정한 뜻을 전하지 않으며 여호와를 거역하는 범죄가 되므로 그 속은 불이 붙어 타기 때문에 입을 열어 발설할 수밖에 없다. 여호와의 뜻만 구한다는 것, 이것은 인간의 보편적 상식과 공감 능력을 벗어나는 차원이다! 오직 여호와만 바라본다는 것(대하 20:12), 오직 여호와의 주권과 자비의 열매다! 여호와만 바라보고 그분만 찬양하는 순수한 기도는 사악한 무리들의 매질(렘 20:1)과 함께 오직 내면에 불붙은 여호와의 뜻 확인으로 가능하다. 마음속 불덩이를 토하듯이 내뱉는 바짝바짝 마르는 선지자의 입술에 담긴 살았고 운동력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기도의 원천이며 정수다. 이러한 놀라운 깨달음과 함께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타는 입술 위에 찬양을 담게 된다.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렘 20:13)

오직 여호와만 경외하도록 하여 여호와의 이름에만 찬양하게 하는 것이 기도의 정수(精髓)다. 정수라는 말의 본래 뜻은 뼈 속의 골수(骨髓) 곧 뼛골을 의미한다. 여호와의 말씀은 자기 백성의 ‘혼과 영,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신다.’(히 4:10) 왜냐하면 그 뼛골에 오직 여호와의 이름만 남겨 놓으시려 하기 때문이다. 언약하신 대로 바벨론에게 유다가 처참하게 멸망당하게 하시는 것도 오직 여호와만 찬양케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 노래와 찬양은 피조물의 감정과 정서에는 결코 담기지 않는다. 자신의 출생까지 증오하게 만들 만큼 인간이 가진 최소한의 기분과 감정과 요구권도 모두 포기하게 만든다. 이 땅에 사는 생명의 가치는 오직 여호와만 찬양하게 하며 그를 경외케 하고 그 능력의 영광(전능하심과 신실하심, 절대주권자이심과 영원하심 그리고 긍휼하심-구약 시가서에 나타난 여호와의 속성)만 뼛속에 담기는 데 있다. 두렵고 떨리는 목소리로 간구하는 하나님 백성의 갈급한 간구와 참담한 울부짖음 속에 여호와의 능력의 영광이 함께한다는 약속의 말씀을 기억한다면, 기도의 정수는 오직 여호와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에서만 찾을 수 있다. 예레미야의 생일 저주 속에 담긴 여호와 간구의 정수를 다시 상고해 보자.


13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14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미가 나를 생산하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15 나의 아비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네가 생남하였다 하여 아비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16 그 사람은 여호와께서 훼파하시고 후회치 아니하신 성읍 같이 되었더면, 그로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 낮에는 떠드는 소리를 듣게하였더면, 17 이는 그[여호와-필자 주]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나의 어미로 내 무덤이 되게 하지 아니하셨으며 그 배로 항상 부르게 하지 아니하신 연고로다 18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수욕으로 보내는고
(렘 20:13-18)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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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언약의 근거, 여호와 자신의 맹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