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사건’, 성도들의 순교와 헌신의 현장이기도 하였다
지난 4월 3일, ‘제주 4·3 사건’ 71주년이었다.
“제주도는 개벽 이래 처음 보는 민족 항쟁의 처참한 사태에 빠져 사상자가 양민 1,512명, 반도(叛徒) 수만 명, 가옥 소실 34,611동, 이재민은 86,757명, 학교 소실로 초등학교 175학교, 중등학교 11개교, 교회 관계 피해는 피살자가 15명인데, 이도종 목사는 작년 6월 16일 교회로 가던 도중에 납치된 후 종적이 없사오며, 허성재 장로는 중학생에게 살해를 당하였고, 서귀포교회 임 씨는 예배당 소제를 하던 중 폭도에게 피해를 당하였고, 교회 건물 피해는 서귀포, 협재, 삼양, 조수 등 4처 예배당이 소실되고, 서귀포, 세화 등 2처의 목사 댁이 소실되었고, 교인 가옥 소실은 서귀포 1, 중문 1, 인성 3, 협재 6, 삼양 15, 제주읍 1, 외도 3, 남원 3동 이상 33호이옵고, 농작물 형편은 전경작지의 5분의 1에 불과하오며, 총성이 그칠 사이가 없으므로 민중은 공포에 싸여 실로 생지옥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는 1949년 4월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제35회 장로교 총회에서 1948년 당시 제주도 노회장 강문호 목사가 제주도 4·3사건 피해 상황 일부를 보고한 내용이다. 다시 말해 당시 제주 인구 10%가 살상 당하는 현장은 성도들의 순교와 처참한 죽음 그리고 죽음의 공포 앞에 떨던 도민들과 성도들을 살리려고 사투를 벌인 헌신의 현장이기도 했다.
밤에는 무장 공비들과 폭도들에게, 낮에는 군경(軍警) 토벌대와 서북청년단에게 처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수만 명 도민들과 성도들을 구하려고 피를 토하는 변호에 앞장섰던 목사들과 지도자들, 교회 부녀회원들과 청년회원들, 그리고 기독교인 장교들과 군인들, 경찰 간부들과 또한 순경들이 있었다.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 수행 범위 내에서 성도와 교회를 사랑했던 신앙 선배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며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반듯이 기억해야 할 교회의 소중한 유산임이 틀림없다.
3,000여 명의 목숨을 극적으로 구하는 데 앞장섰던 조남수 목사를 비롯한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있었다. 설교 시간에 맞춰 순경들을 동원해 경비를 서준 지서장이 있었으며 본인이 직접 전도하면서 함께 설교 시간에 참여해 준 순경도 있었다. 제주 중문 지역 한 경사(警査)는 폭도로 의심받는 청년들 30여 명을 전도하여 교인들로 등록시켜 생명을 보호해 주었다. 사찰계의 한 형사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면서 마을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숨은 조력자가 되었다. 토벌대의 어떤 대령과 대위는 마을과 교회를 보호하면서 동민들과 함께 교회당을 지었다. 주민들은 너무 감사한 나머지 교회 이름에 그들의 이름을 한 글자씩 넣기도 했다(‘함명교회’).
‘제주 4·3 사건’, 그 현장에도 교회의 머리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살아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