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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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7-25 20:5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의의 길


지난 5월, “의의 길”이라는 주제로 성경강론 저자의 특강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초두에 시편 23편 3절을 읽어가는데 나로 정신이 번쩍 들게 했다. 다윗의 유명한 시로 귀에 익은 말씀이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열 마디를 줄이고 줄여서 한마디로 표현하고, 한마디로 표현했어도 백 마디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 말씀이 아닌가. 그러나 솔직히 이러한 성경 말씀을 풀어 가르쳐 주는 자가 없으면 토막지식은 가능하겠지만 그 깊은 뜻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고, 나의 경험으로 볼 때 교재가 없이는 기억력이란 한계가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호와 계시’라는 주제로 신, 구약성경 전체의 내용을 담고 있는 근본적인 깊은 뜻, 곧 성령 하나님의 근본 의도를 논리적인 체계에 의해 밝혀주는 성경강론전집(박용기 저)이 내 손에까지 쥐어지게 해서, 핵심적으로 정리하는 내용에 한결 빠져들면서 재미있고 감동이 새롭게 다가왔다. 강론을 듣는 내내 지혜와 총명이 흐려지지 않게 되기를 바라고 기도하면서, 들은 말씀 깊이깊이 뿌리가 뻗게 뇌리에 꼭 묻어두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 세상에는 어떠한 것도 해답이 있는 진리는 없고 그냥 문제의식 속에서 과정적인 이론 뿐이다. 그러나 다윗은 의의 길을 알고 있었다. 자기가 살아오면서 하나님 섭리를 보니까, 형편없는 자기를 소생시켜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 자기를 위해서 의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당신 이름을 위해서 의의 길로 인도하시더라는 것이다. 여호와는 언약하시고 언약대로 이루신다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미 계획하신 경륜 따라 빈틈없이 정확하게 역사는 흘러간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 있다. 택한 백성은 누구나 성령의 조명을 통해, 그 결과로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알고 믿어 그분을 경외하게 되므로,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그 길이 의의 길이라는 것을 놓치지 않아야 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의의 길로 섭리하는 방법은 인간의 표현으로 꼬부랑길이다.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탈출하게 했으면 가나안땅을 걸어서 일주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하나님께서는 홍해 바닷가 구부러진 곳으로 인도해 놓고는, 뒤에서는 애굽군대들이 뒤 쫓아오도록 하나님이 여건을 조성해 간다. 진퇴양난이다. 언약의 땅으로 가자고 애굽에서 출발하게 해놓고 홍해 바다를 건너지도 못하고 거기서 죽어버리게 되면 하나님의 계획은 무너져버리고 ‘여호와’라는 이름값을 못 하지 않는가. 죽게 내버려 둔다면 하나님을 여호와로 믿을 수 있겠는가. 만사는 하나님 마음대로였다. 결국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를 건너게 하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배우게 하는 과정으로 광야 40년 길을 돌고 돌게 해서, 가나안땅까지 무사히 도착하는 전체의 길이 의의 길임을 깨달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전능하신 주권자 여호와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 자체, 곧 말씀으로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구원자로 오신 길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아닌가. 
만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이 고통으로 끝났다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그러나 처음부터 의의 길을 정해놓고 그 길을 향해 가도록 섭리하신 여호와 하나님, 야곱 때에 요셉이 죄도 없이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간 것도 의의 길이라고 믿는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안 팔려갔으면 어쩔 뻔했는가. 흉년 때, 아버지 야곱과 그 형제들, 70명 되는 가족이 다 굶어 죽었을 것 아닌가. 그뿐만 아니라 요셉이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감옥에서 바로의 꿈을 해석해 줄 수도, 총리 자리는 엄두도 못 낼 일이다. 따라서 하나님 여호와의 섭리를 따라 살게 되는 자에게는 세상에 안 좋은 일이 없다. 다 의로운 길이라는 말이다. 야곱은 누구인가. 형 에서를 속이고 눈먼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 복을 받은 자이다. 인간적으로라면 멸해야 한다. 그러나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야곱을 죽이려고 하는 에서를 피해서 외삼촌 집으로 도망가지 않게 했으면 어떻게 유다가 태어났겠는가. 유다는 야곱의 넷째아들로 유다에게서는 왕의 홀, 치리자의 지팡이가 떠나지 않는다고 축복을 받은 자가 아니던가. 그것도 외삼촌에게 속아서 마음에도 없었던 아내인 미운 레아에게서 유다가 태어났는데, 야곱의 생각대로 사랑하는 라헬만 아내로 얻어드렸으면 유다지파 왕족은 없었고, 유다지파 왕족에게서 다윗이 출생하지 않았으면 야곱의 할아버지인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님이 올 수 있었겠는가. 예수님이 안 오셨으면 우리는 할 수 없이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여호와께서 야곱으로 아버지를 참 잘 속여먹게 했고, 외삼촌이 야곱을 속여먹게 한 것도 고맙지 않은가. 사실 하나님의 정한 의의 길은 나 자신의 선행이나 내 뜻대로 가는 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레아가 낳은 유다지파 후손에서 태어나게 했다. 이새의 아들 가운데 제일 못난이로 들판에 가서 양몰이를 하는 자였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로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게 했다. 다윗이 아버지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갔다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독하는 것에 치밀어 올라 블레셋의 골리앗 장군을 해치우겠다고 나섰다. 너는 칼과 창을 의지하고 내게 나왔지만 다윗은 ‘여호와’ 언약대로 의의 길로 인도하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돌을 던졌는데 골리앗 이마에 명중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다윗은 아들 압살롬에게 왕궁을 빼앗기고, 그 아들이 죽은 후에야 돌아와, 전쟁터로 군대들을 내보내 놓고 옥상을 거닐다가, 대낮에 샤워하는 여인을 발견하고 결국 간통을 하게 되고, 그 범죄를 숨기기 위해서 그의 남편을 전사하도록 했던 다윗, 그런데 그 간통한 여인에게서 낳은 아들이 다윗의 뒤를 이은 이 세상에서 최고로 지혜 있다는 솔로몬 왕이 아니던가. 하나님의 언약은 신실하시다. 영혼을 소생시켜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다윗의 노래가 내 마음에 울려 남는다.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께서 홍해 바다를 갈라지게 해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니까 요단강이 갈라지지 않았어도 첨벙첨벙 들어가는 그 믿음의 행위로 진격하게 했듯이, 마찬가지로 지금도 살아계셔서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여호와께서 최후 승리의 그 날까지 항상 동행하실 것이 분명하니까,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평안히 요단강을 건너게 할 것도 분명하지 않은가. 정녕 ‘여호와’ 자기 이름을 위하여.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강미정 권사 (광주산수서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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