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09-10-06 01:00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성에 관한 지식과 생명 통제 전략들


미셸 푸코 사상의 기반은 프리드리히 니체다. 그들을 연결하고 있는 고리는 객관적이며 중립적인 지식이란 없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사상과 가치들은 타인들을 지배하기 위한 권력의 다양한 표현들이다. 만약 고상한 사상과 가치라는 것이 권력의 표현에 불과하다면 두 철학자에게 철학의 기능은 지배 권력에 대한 진단과 비판이다.

  절대 가치였던 신의 죽음 이후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모든 문화는 철저하게 세속화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푸코에 따르면 이 세속화가 더 큰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세속화 과정은 동시에 새로운 지배 장치에 더 철저하게 종속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푸코는 그 예를 고대 그리스 사회의 남색(男色)이 기독교화된 가족 중심의 도덕에 의해 몰수당하는 과정에서 찾는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질서를 부여한다는 기독교의 도덕적 규범이 역으로 개인의 삶을 더 철저하게 통제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로마 가톨릭의 고해성사와 같은 자백의 기술에 의해 성은 더 철저하게 억압받는다. 

  개인의 은밀한 자유로움(?)이었던 성(性, sex)은 이제 이성(異性) 사이의 문제로 제한되고, 그것도 두 사람의 의사결정은 무시되고 가족 관계에서만 정당화된다. 이를 테면 결혼은 두 가족간의 이해타산을 충족시키기 위한 거래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또 상호 동맹의 수단이 되거나 재산 교환 혹은 인척 관계 형성의 도구로 변질된다. 이렇게 성은 종교적이거나 법적인 의무 조항에 휘둘리면서 개인의 욕구 충족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성에 대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성적 쾌락(sexuality)에는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부분이 남아있었다. 즉 성은 사적 영역의 숨겨진 기쁨이었으며 신체에 관해 남겨진 환상들도 있었다. 푸코에 따르면 이러한 쾌락은 개별적 존재의 본질과 인격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핵심적 부분이었다. 권력관계에 종속된 성을 다시 인격화하고 삶의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도록 돕는 것이 바로 성적 쾌락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성적 쾌락도 근대에서는 통제권력에 곧바로 노출된다. 왜냐하면 개인의 성적 쾌락을 과학적 관리라는 미명으로 통제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의사와 심리학자들이다. 이들은 각 개인의 정체성이 개인의 욕망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성을 가족의 문제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축소해서 다루기 때문에, 과거 어느 경우보다 더 집요한 ‘생명통제권력’(bio-power)들이 된다. 개인의 주체성을 성적 쾌락과 관련짓고 성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수립함으로써 욕망을 더 ‘합리적으로’ 통제한다. 이러한 성에 대한 통제는 여성들과 아이들에게 더 집중된다.

  이러한 상황을 푸코는 이렇게 말한다. ‘권력과 지식은 성적 쾌락의 주변에서 구성된 특수한 메커니즘을 통해서 결합되었다.’ 다시 말해 극히 개인적인 취향에 해당하는 성적 쾌락이 다른 어떤 지식보다 권력에 의해 더 철저하게 관리되고 통제받는다는 아이러니이다. 그 예로 보면 우선 ‘여성 신체의 히스테리화 규정’이다. 즉 여성 신체를 의학적 분석의 대상으로 영역화함으로써 여성을 통제한다. 여성의 인격이니 정체성이니 건강이니 하는 것은 모두 신체를 더 철저하게 통제하는 구실에 불과하다. 그 다음으로 ‘아이들의 성을 교육의 대상으로 규정’한 경우다. 여성의 경우보다 더 철저하게 통제하기 위해 어려서부터 갖가지 금기와 규정을 미리 제시하고 통제한다. 뿐만 아니라 여성의 출산 행위를 생명 자체의 귀중함보다는 노동력 창출과 같은 경제적 맥락에서 규정한다. 나아가 일견 비정상적인 쾌락으로 보이는 것들은 치료라는 이름으로 가차 없이 정신치료의 대상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푸코에 따르면 성행위는 치료라는 이름으로 통제할 대상이 아니라 어떤 요소들이 더 두드러지느냐의 문제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푸코는 그리스 사회의 성행위에 나타난 세 가지 축을 소개한다. 그 축은 행위(acts), 쾌락(pleasure) 그리고 욕망(desire)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요소는 분리할 수 없다. 그런데 그리스에서 강조한 것은 ‘행위’이다. 이런 점에서 쾌락과 욕망은 행위를 앞설 수 없다. 즉 ‘행위>쾌락>(욕망)’의 패턴으로 행위를 위한 쾌락과 욕망이다. 욕망에 괄호 친 이유는 당시 스토아 윤리학이 욕망을 제거하는 일로부터 행복이 시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양과 다른 중국의 경우는 쾌락>욕망>(행위)였다. 즉 쾌락을 위한 욕망과 행위이다. 행위가 배제되는 것은 쾌락의 시간과 정도를 극대화하기 위해 행위를 억압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욕망에 초점을 맞추면서 동시에 욕망을 제거하고자한다. 행위는 중립적인 어떤 것이 되어야 한다. 행위를 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아이를 낳거나 부부의 의무를 실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쾌락은 실천과 이론 모든 면에서 배제된다. 즉 (욕망)>행위>(쾌락)이다. 결국 욕망도 실천적 측면에서는 배제된다. 여기에 반발한 것이 근대다. 근대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욕망이었다. 욕망은 이론 면에서 강조되었고 실천면에서 수용되었다. 왜냐하면 중세로부터 억압받았던 자신의 욕망을 해방해야 했기 때문이다. 행위는 어떠하든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으며 쾌락은 욕망보다 덜 강조했다.

  위와 같은 푸코의 진단이 옳든 그르든 중요한 것은 가장 개인적이고 은밀한 성과 성적 쾌락은 철저한 관리와 통제 아래 있다는 사실이다. 즉 아직도 한편으로는 종교적으로 규범화함으로써 더 금기화하고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지식의 대상으로 쉽게 넘겨버림으로써 개인의 감정과 의지가 과학에게 몰수당하는 경우가 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성에 대한 성경적 이해는 어떠해야 하는지 깊게 고민하게 된다. <다음 호에는 ‘동성애와 우정’의 문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동성애: 욕망과 존경 사이
욕망의 동성애인가, 절제의 우정인가(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