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09-11-03 12:00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동성애: 욕망과 존경 사이


그리스도의 탄생으로부터 시작해 유럽으로 전래된 기독교는 4세기 말 로마제국에 의해 국교로 확정된다. 진리와 거짓, 선과 악 그리고 미와 추의 모든 기준은 이제 성경의 하나님이 되었다. 그리고 기독교가 국교가 되었다는 사실은 현실적으로는 종교세력들이 최고의 권력기관이 되었다는 말이 된다.

  푸코는 이 사실을 유럽의 정신 역사 면에서 되짚어본다. 최고의 진리를 말하고 신성한 행위를 보여준다는 그 세력들이 사악한 의도를 가지고 추악한 짓을 일삼는 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것은 단지 표면적으로 드러난 행위를 두고 평가하자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푸코가 했던 이러한 폭로의 의도는 서양 역사에서 종교적 도덕에 의해 억압과 배척을 당한 인간 본성의 다른 면들을 사실대로 되돌려놓고자 하는 데 그 의도가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이 배척당한 자들, 즉 신성모독, 동생연애, 자살, 본질을 흐려놓은 연금술와 마술, 미신숭배자 나아가 가난한 자까지도 해당된다. 이들은 지배권력의 관점에서 ‘비정상인’으로 분류되었다. 이른바 관습과 도덕 그리고 과학과 상식을 벗어나며 일반적 사회질서를 위반하는 부류가 되었다.

  푸코가 사용한 사유방법은 기독교가 서양에 전래되기 이전의 시대 즉 고대 그리스로 돌아가보는 것이었다. 그는 특히 성(ses)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지난 호들에서 보았듯이) 그리스 사회에서 이른바 자유인들이 행했던 ‘동성애’에 초점을 맞춘다. 그 당시 그들을 지배했던 덕목은 ‘우정’(philos)이었다. 사랑을 주도했던 자의 자기 절제(節制)와 사랑 받은 자의 존경이 오랫동안 지속하는 가치로 기억되는 것이 그들이 추구한 우정이었다. 그래서 푸코에 따르면 우정은 배타적이고 일방적이 아닌 상호 협력과 인정의 방식이었다. 사랑하는 자와 받는 자가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다. 하지만 사랑의 주관자는 가능한 사심을 빼고자 했으며 상호 지속적인 면들을 만들어가는 데 역점을 두었다.

  그런데 이렇게 상호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푸코가 어떤 특정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푸코는 아무리 고상해 보이는 행위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권력의지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늘 전제한다. 상호 유익한 가치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그에게는 권력을 서로 교환하는 행위이다. 그 사이에서 도덕이 발생하고 규범과 질서가 만들어진다.

  이러한 사실에는 현실 역사를 초월한 객관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는 이상적 미래란 지배세력들의 장기집권적 구호에 불과하다. 권력 관계의 긴장 속에서 누가 선이고 악이냐 하는 판단은 결정할 수 없으며 결국 무의미하게 된다. 더욱이 이 기준의 무의미함과 싫고 좋음의 판단을 하루에도 수없이 내려야 하는 현실을 대비시켜보면, 삶 자체는 그야말로 혼돈이고 자기모순이다. 선악 판단의 기준을 정할 수도 없는데 어느 시대보다 더 빨리 좋고 나쁜 것을 취사선택해야 하니 말이다. 그럴듯하게 보이는 삶을 사는 것 같지만 난센스이며 코메디이다.

  이러한 자기모순이 인간의 본성을 지배하고 있다고 폭로한 자들이 니체며 또한 푸코다. 소위 진리를 탐구하는 자라면 이미 권력지배의 구조 속에 함몰되어 있다는 것이다. 순수한 진리를 추구하면 할수록 결국 타인을 지배하려는 탐욕을 더 부리는 꼴이 된다. 가장 고상하게 보이는 성자의 행위는 자신의 지배권을 전인류로 확대하려는 우주적 탐욕의 결과이다.

  푸코에게는 이러한 성향이 어느 특정한 인간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여기 이렇게 존재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실존적 상황이다. 가장 사악한 놈에서 최고로 성스러운 분에 이르기까지 타인과 세상 지배욕에 매몰된 채 자기모순의 늪에 허우적거리고 있다. 중세는 그것을 특정한 세력들이 최소한의 의식도 없는 자행한 시대였다면, 근대는 인간의 이성을 회복하고 완성한다는 명목 아래 또 다른 무지의 억압을 일삼은 시대다.
  푸코가 권력의지와 관련해서 고대 그리스 인들에게 후한 점수를 주는 것은 그들의 행위가 다른 시대보다 더 나는 면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적어도 내면에 작동하는 권력의지가 삶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임을 누구보다 철저하게 의식하고 있었으며, 자기모순의 불합리함을 솔직하게 인정하려고 했다. 그래서 푸코는 니체처럼 고대 그리스 사회로 되돌가보려는 것이다. 진리 탐구의 최소한의 여지도 사라져 버린 경우 어떻게 이 현실을 정당화할 것인가를 누구보다 깊게 고민한 자들이 고대 그리스도인들이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증거했을 때,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최고임을 자부했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참람한 말을 하는 미친 놈으로 욕했다. 이러한 유대인들에 대해 그리스도는 그들이 독사의 자식들이며 마귀의 후손이라는 심판을 내렸다.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판단이 정반대임을 보여준다.

  진리를 추구한다는 기독교인으로서 그럴듯한 나의 소행도 바리새인들에게 내리는 심판의 철퇴를 그냥 지나쳐 갈 수는 없다. 인간적으로 대절망이고 무엇 하나 내세울 수 없는 지경으로 빠져든다. 그래도 그 추락의 끝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과 그리스도 예수의 믿음이 함께 소멸되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한다. 아직도 성경진리에 대해 관심 보이게 하고 탐색의 소원을 남겨주심에 감사할 뿐이다. 일찍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려준 저 지극한 사랑(philos, 요15:13~14)을 감히 그리스적 우정과 비교할 수는 없다. 

<다음 호에는 ‘니체와 해체주의’를 다루고자 합니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쟈크 데리다: 성경(the Book) 해체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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