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5-10-11 10:43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근본의 앎을 지향하며


子曰 “聽訟 吾猶人也。 공자가 말하였다.”재판하는 것은 나도 다른 사람과 같다.
자왈 청송 오유인야
必也使無訟乎“。 반드시 재판을 없게 할 것이다.”
필야사무송호。
無情者 不得盡其辭, 진실을 가지지 못한 자가 자신의 말을 다 하지 못하는 것은
무정자 부득진기사
大畏民志 크게 백성의 뜻을 두려워해서인데,
대외민지
此謂知本。 이것을 ‘근본을 안다’고 하는 것이다.
차위지본
『대학』 전문4장

‘청송’이란 사람들이 서로 고소·고발하는 말들을 듣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재판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아무리 공자가 위인이라 하더라도 재판할 때에는 다른 재판관들이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재판은 상식적으로 원고와 피고의 말을 듣고 또 관련된 증거나 증인들을 참고하고서 법대로 판결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어떤 재판관이 이런 정도의 지식들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상식적인 수준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재판관은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공자는 사람들의 송사(다투는 일)를 없애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공자가 재판을 하는 이유는 그 재판을 바르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기준이 되어 더 이상의 송사를 필요 없게 하려는 데 있었다. 이 사실을 꿰뚫어 아는 것이 재판과 관련한 근본의 앎이었다.
송사할 때에 진실이 없는 사람들(無情者, those whose claims have no substance)은 그들의 사정이나 실상에 대해 설명할 때에 끝까지 그들의 말을 다 할 수가 없다. 모든 백성들이 그들(무정자들)의 말에 대하여 나름의 생각들을 가지고 분별하고 있다는 사실이 두렵기 때문이다.
사실 본문은 이미 앞의 경문에서 출전했던 ‘격물치지’에 대해 더 자세히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글이다. 사람이 어찌 해야 모든 사물이나 사태의 실정을 알아서 그 근본의 앎에 이를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한 설명인 것이다.
본문은 근본의 앎에 대해 두 가지 방안을 제안한다. 하나는 드러나는 일을 통해서 그 근본의 사정을 먼저 이해해야 하는 것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그것은 송사의 경우에는 궁극적으로 일체의 다툼을 없애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하나는 모든 사물이나 사태의 진실 또는 실정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경우든 모든 백성들이 그 실상을 두루 살피며 뜻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 두어야 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근본적인 앎은 무엇이어야 할까.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언 1장 7절)이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택한 민족을 세우시리라고 언약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세상 만물의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이 되시는 분이시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그것이 앎의 근본이다. 경외란 공경함과 두려워함이 동시에 담겨 있는 마음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식이란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경외함으로 성경 속에서 말씀하시고 보이시고 계시는 하나님을 알고 또 알아가야 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그들이 만나는 모든 일이나 사건, 그들의 생각들의 흐름, 마음의 결단들 속에서 만물의 처음과 나중이 되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이 하나님을 이해하고 느끼고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근본 지식(fundamental knowledge)이라고 본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고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경험도 없이 그냥 자신의 설명만을 번지르르하게 해댄다면 그것은 지금까지의 하나님을 믿은 허다한 지난날의 증인들과 당대에 예수를 믿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장차 예수를 믿을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내뱉는 부끄러운 지절거림에 불과할 뿐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철학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과 일대일로 독대하여 느끼는 자기 실존의 확인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신다. 이 하나님 앞에 단독으로 서서 모세가 대화했던 것처럼 지금도 성경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다. 단독으로 하나님과 대화함을 체험하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그는 신앙의 실존자가 될 수 없다. 하나님과 독대하여 실존하는 자만이 그의 생활 세계에서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진실과 실상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지 못한 자가 목소리로만 몸으로만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거나 하나님을 설명하는 것은 수많은 사람의 지탄을 받게 될 뿐이다. 현실적으로 우리나라의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형식화되어 있는 하나님에 대한 앎을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나라 교인들이 전국적으로 서로 엇비슷하게 정형화된 형태로 증언하는 대신에 개성 있고 생생한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 거론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명심해야 할 사태라고 본다.
대한의 기독인들이여! 가정과 학교와 직장과 사회에서 하나님을 아는 근본 지식을 배양하는데 힘쓰도록 하는게 어떻겠는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실상을 내 삶 속에서 확실하게 체험하고 굳건히 간직해 가는데 앞장서가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작게나마 바른 삶을 실천해 가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러한 삶의 유지가 대한의 기독인들이 유구한 역사에 빛나는 대한민국에 대하여 지니고 있는 빚이 아니겠는가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교육학 박사, 백석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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