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0-04-30 09:09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신의 죽음’과 ‘기초존재론’의 허구


하이데거는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고향상실’의 시대라고 불렀다. 물론 철학적 의미가 담긴 말이다. 하이데거 자신을 포함한 유럽인들에게 정신의 고향은 아마 기독교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서양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라는 존재가 돌아갈 고향일 것이다. 그렇다면 고향상실이란 신이 없어졌다는 말이 된다.

  신의 부재(不在)에 대해서 우리는 금방 ‘신의 죽음’을 선언한 니체를 떠올린다. 하이데거가 태어날 무렵인 19세기말 니체는 광인을 등장시켜 신의 죽음을 천하에 공포한다. 신은 죽지 않는 존재인데 신이 죽었다는 말은 ‘죽지 않는 존재가 죽었다’는 모순되는 말이다.

  이 말이 참이 되려면 ‘죽지 않는다’는 말이 거짓말이 되어야 한다.  결국 죽을 만한 존재였기 때문에 죽었고, 죽지 않는 그런 존재는 애초부터 있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신의 죽음을 고향상실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 고향을 다시 찾을 수 있다고 믿고 자신의 철학을 전개한다. 이러한 그의 시도를 다른 말로 ‘기초존재론’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하이데거에 의하면 신의 죽음과 같은 절대적 가치가 붕괴되는 사건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서양 철학 내지 서양 기독교는 신과 같은 궁극적 존재를 ‘경험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사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간이 지나면 본래의 모습이 사라지거나 결국 소멸하는 물질적 존재와 같은 대상으로 간주했다는 말이다. 그 결과 궁극적 존재를 확보하기는커녕 그 존재는 더 왜곡되어 망각되었다.

  물론 이러한 태도에는 궁극적 존재가 있으며 그 의미를 철학적 사유를 통해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이 깔려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형이상학자와 신학자들처럼 객관적이며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 다른 어떤 곳에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인간의 사유를 통해 인간 내면에 궁극적인 ‘존재의 의미’를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주려고 한다. 
 
  하이데거의 생애를 볼 때 그는 어린 시절과 청년기 초반까지 가톨릭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가톨릭 교리의 특성상 인간은 이성을 통해 최고 존재자인 신을 파악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숙지했을 것이다. 이후 가톨릭과 결별하고 (불트만과 같은) 독일 개신교의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교류하지만 궁극적 존재에 대해 인간이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은 계속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그의 주저인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에 대해서 주장했던 바는 이전의 서구 철학자들과 다른 면이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신과 같은 궁극적인 존재는 개념적 사유를 통해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숨겨진다. 그 결과 본질은 망각되고 그와는 거리가 먼 다른 대상이 마치 본래적인 것처럼 행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이미 어느 정도 본래의 존재를 ‘이해’하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비록 그 존재가 조작되어 어떤 물리적 대상으로 전락하긴 했지만, 언제나 인간의 사유 가까이에 함께 해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의 생생한 경험의 한 예로 하이데거는 신약성경의 ‘데살로니가 전서’를 설명과 함께 소개한다. 다시 말해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존재를 단지 개념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 생생하게 체험하면서 살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 변증가들과 교부들 나아가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에 의해 (신과 같은 궁극적) 존재는 사물(事物)로 전락해 왔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지적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볼 때 서양 철학과 신학에서 탐구했던 ‘존재론’은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 하이데거를 따르면, 인간의 가능성 중에 가장 핵심적인 능력은 ‘존재의 궁극적 의미’를 묻고 밝히는 데 있다. 이 능력을 다시 일깨워 최고 존재였던 신의 죽음으로 고향을 상실한 시대의 한 복판에서, 이제야말로 인간이 자유롭게 스스로 ‘존재 의미’가 무엇인지 제대로 탐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21년 제자 칼 뢰비트에게 보낸 서신에서 하이데거는 자신을 ‘기독교 신학자’라고 칭하며, ‘자신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니체가 죽인 신을 대체하는 새로운 신을 기다린다는 말이다. 이 신은 헬라적인 잡신(雜神)도 유대 기독교적인 유일신(唯一神)도 아니라야 한다. 더 이상 사물적인 대상으로 파악되지 않는 신이어야 한다. 인간의 실존적 삶과 아주 가까이 있으면서 동시에 쉽사리 간파하기 어려운 존재다. 중요한 것은 ‘지금여기이러한 현존(現存)’을 통해서 분명히 그 모습을 일부 숨기면서 또한 일부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하이데거의 자기모순적인 이러한 어법에는 자기 철학과 전통 형이상학 내지 신학의 차별화 의도가 있다. 나아가 인간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더 확고하게 정립하려는 목적이 있다. 하이데거는 신의 죽음 이후 소멸해버린 존재의 근원적 의미를 현재의 바로 이러한 존재(현존재, 現存在)를 통해 새롭게 소생시키려고 그 기초를 다시 닦고자 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시도를 ‘기초존재론’이라고 부른다.

  니체가 신의 죽음을 통해 근원적 존재의 허구성을 폭로한 이후 하이데거의 말처럼 인간이 돌아가야 할 고향은 사라져 버렸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이 존재의 근원을 찾을 수 없도록 마음의 정욕대로 그리고 상실한 마음대로(롬1:24, 26) 던져버린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은 하나님의 시대 심판을 본성적으로 거부하려는 현대인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엄정한 심판의 한가운데서 고난 받기 전 그리스도의 다음 기도를 통해 성령께서는 기초존재론의 허구됨을 다시 한번 책망해준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처럼
모두 하나가 되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소서(요17:21).
 
<다음 호에는 신의 모습으로서 ‘현존재라는 인간’을 다루고자 합니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존재’의 현현(顯現)이라는 ‘현존재’의 허구
니체의 후손, 마르틴 하이데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