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24-07-03 06:48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예순하나. 로마제국의 우상철폐와 기독교의 절대권력화 과정 I


주후 380년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347-395)는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언함과 동시에 로마의 전통 신앙과 의식을 축소하거나 폐지하는 정책을 펼친다. 그가 반포한 테살로니카 칙령(Edict of Thessalonica)에는 로마 제국의 유일한 공인 종교는 기독교이며 모든 로마 시민은 니케아 신조(Nicene Creed)를 따르는 기독교를 믿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이 신조의 핵심은 한 분 하나님의 세 위격,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성부와 동일 본질,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참 신이며 참 인간이심, 경배의 대상 하나님으로서 성령임을 강조하고 있다. 황제가 공포한 이 신조는 이후 로마의 전통 종교에 속한 신앙과 예배 의식들을 철폐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황제는 391년과 392년 연이어 로마 종교의 금지령을 내린다. 공공장소에서 이교 의식을 금지시켰고 이교 사원을 폐쇄하거나 파괴하였으며 이교 의식의 비밀 집회도 중지시켰다.

이러한 로마의 전통 종교 말소 과정에 하나의 큰 사건이 정리되기도 한다. 이른바 ‘알타레 빅토리아(Altare della Vittoria, Altar of Victory)’ 즉 승리의 여신상 철폐의 논쟁이 그것이다. 기독교를 로마 국교로 반포한 이후에도 로마 포룸의 원로원 건물 쿠리아 율리아(Curia Julia) 내의 제단에는 여전히 이교도의 상징 승리의 여신상이 놓여 있었으며 원로원 회의를 개최할 때마다 향을 피우고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거행했다. 종교는 바뀌었지만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군사적 승리와 번영을 기념하는 상징물을 쉽게 없앨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알타레 빅토리아의 철거를 완강하게 반대한 원로원이자 기독교도가 있었다.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Quintus Aurelius Symmachus, ca. 345~ca. 402)였다. 뛰어난 웅변가이자 작가였던 그는 알타레 빅토리아의 철거에 반대하면서, 로마 전통 종교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하고, 로마의 전통 신앙과 기독교가 공존할 수 있다는 탄원서를 황제에게 제출했다. 하지만 로마 다신교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그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당대 유명 신학자이며 아우구스티누스의 스승이자 멘토였던 암브로시우스(Ambrose of Milan, 340-397)의 의견을 받아들여 황제는 알타레 빅토리아를 철거해 버렸다. 이 사건이 종결되면서 원로원 체제의 공화국은 점점 쇠퇴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대리자로 확신하는 황제 권력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그런데 이러한 황제의 권력은 자신을 또 다른 하나님의 ‘진짜’ 대리자라고 확신하는 자들에 의해 다시 그 세력을 점점 잃게 된다. 하나님의 진짜 대리자로 자청하면서 황제의 권력과 대립하고 황제의 권력마저 점점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자 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은 로마 귀족 즉 원로원이나 귀족 출신 정치가들이었다. 이들은 황제의 권력에 순응하는 듯하면서 오히려 종교적 대의명분을 독차지하는 전략을 세운다. 그런 후 황제의 정치 권력을 종교적 권력 아래 종속시키고자 한다. 이렇게 해서 그 세력을 확장하는 자들은 바로 로마의 기독교 감독들이었으며 이는 향후 중세 교황 체제의 강력한 토대가 된다.

이러한 교황 체제의 토대를 놓은 인물이 바로 앞서 간단히 소개한 암브로시우스이다. 그는 밀라노의 총감독이자 제국장관의 직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부친은 현재 프랑스, 영국, 스페인을 통치했던 막강한 권력자로서 총독(Praetorian Prefect)이었다. 이러한 배경 가운데 암브로시우스는 군사력과 정치력을 구비한 자로서 당시 이탈리아의 수도 밀라노의 총독이 되었다. 373년경에 일어났던 니케아파(성자는 성부와 동일 본질임을 주장함)와 유사본질파(성자는 성부와 유사한 본질임을 주장함) 사이의 격렬한 논쟁과 분열이 살인적 폭동으로 변할 때쯤 암브로시우스는 니케아파 반대자들과 이들을 옹호하는 서방과 동방의 황제들을 무자비하게 다루면서 이 사태를 종결시켰다. 그런데 암브로시우스는 황제의 자리를 원하지 않았고 영적 권력의 수장인 교회 총감독 자리를 선택했다.(462-464 참조) 이로써 알타레 빅토리아 즉 승리의 여신상 철거로 황제에게 수모를 당했던 귀족 세력들은 교회의 권력에 줄을 섰으며 교회 총감독을 자신의 보호막으로 삼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암브로시우스는 이스탄불 중심의 동방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당대에 심각했던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자신의 뜻을 따르라고 명령한다. 하나는 메소포타미아에서 그리스도인들의 폭력으로 회당을 잃은 유대인에게 하려던 보상을 취소하라는 명령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테살로니카 폭동 주민에 대한 학살을 회개하라는 명령이었다. 그 결과에 대해 역사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탈리아 총감독 암브로시우스의 권력 장악 이후 로마 황제는 더 이상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기독교 권력 중심의 체제하에 서방의 초대교회 역사는 막을 내리면서 교황 체제 즉 천년의 권력 로마 가톨릭 시대로 넘어간다. 4세기 말 암브로시우스가 기독교를 이용해 장악한 정치적 권력에 대해 교회역사가 맥클로흐는 비판적으로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 계획의 정점, 황금시대의 시작”(464)이라고.


<258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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