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2-09-04 09:57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레비나스의 탄원-타인(他人), 왜 있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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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는 철학적 문제를 인간 의미에 관한 물음으로 보았다.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난 그는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 대학(1923-27년)과 독일의 프라이부르크에서 공부했다(1928-29년). 1939년 프랑스 군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포로가 되었으며 그 덕택으로(?) 살 수 있었다. 리투아니아의 유대인인 그의 가족들은 전쟁 중에 모두 학살되었다.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실존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로부터 배우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반(反) 하이데거주의였으며 이렇게 평가했다. “하이데거로부터 인간에 대한 사랑이나 사회적 정의를 배울 수 있는지 회의적이다.” 히틀러가 총통으로 집권할 무렵(1934년 8월) 하이데거는 나치즘 동조 혐의를 받고 있는 사건인 1933년 5월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으로 취임하여 「독일 대학의 자기 주장」이라는 취임문을 발표한다. 이 무렵 레비나스는 나치즘을 비판하는 글 「히틀러주의 철학에 대한 몇 가지 고찰」(1934년)을 발표한다. 레비나스는 전체주의, 히틀러주의 철학을 이렇게 경계한다. “현대 독일이 재발견하고 신성시하는 니체의 힘의 의지는 (……) 전체화의 고유 형태, 즉 전쟁, 정복 등을 불러일으키는 관념이다.”(앞의 책, 194쪽)

  레비나스는 몸소 겪은 제2차 세계대전의 폭압성에서 현대 서양 문명의 전체주의적 성향을 간파했다. 전체주의가 모든 활동을 전체의 존립과 발전을 위해 각 개인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라면, 이 이데올로기에서 타자(他者, autre)는 생존의 동반자가 아니라 사욕(邪慾)을 채우는 수단으로 이용된다. 다시 말해 자기 인식의 체계 안에 모든 것을 내재적으로 환원시키고 수많은 다양성을 한 집단의 이익 총화(總和)를 위한 희생양으로 삼는다. 이처럼 전체주의는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 다양한 존재의 차이성을 묵살하고 최소한의 공존의식마저 버리는 사악함을 드러낸다.

  이러한 전체주의의 폭압에 맞서서 레비나스는 전체성의 이름으로 획일화할 수 없는 고유성을 강조한다. 곧 타자의 고유한 본성, 타자성(他者性)이 그것이다. 타자란 ‘어떤 수단으로도 지배할 수 없는 절대적 외재성’이다. 자아 정체성의 수단으로 축소되거나 왜곡될 수 없으며 언제나 뒤로 물러나 있는 자아와는 다른 존재가 있다.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면 자아 정체성의 탐구는 곧 타자와 타인에 대한 억압과 지배 행위가 된다. 레비나스는 자아 정체성의 확립과 보존이라는 이름으로 발생했던 폭력적인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서양의 존재론이라고 비판한다.

  자아 정립을 위한 존재론적 탐구는 윤리적 문제와 직결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레비나스는 이렇게 말한다. ‘윤리학은 존재론에 앞선다.’ ‘앞선다’(precede)는 말을 선행하면서 선도한다는 말로 바꾼다면, 모든 실존은 타인과의 인격적 관계를 전제로 한다는 말이며, 존재의 진정성은 타자에 대한 배려를 목적으로 하지 않으면 그 본질을 찾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타자에 대한 도덕적 배려가 존재의 본질을 찾는 전제 조건이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니체가 말한 신의 죽음으로 대변되는 절대적 가치가 상실한 시대에 살고 있다. 무엇이 선행이며 악행인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 시대의 특징이다. 니체의 신의 죽음 이후 레비나스는 다른 존재와의 도덕적 관계 맺음 속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확보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 관계에서 언제나 상존하는 권력관계에 대한 레비나스의 인식은 철저해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타자성에 대한 강조는 다양한 관계의 필연성을 말하며 관계의 동력은 힘의 관계, 권력지배관계이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는 사라져 버린 사건이 아니며 망령으로만 떠돌지 않는다. 극복되거나 사라질 수 없는 본성으로 여전히 자행되고 있다. 레비나스의 ‘타자 중심의 형이상학’적 이상(理想)은 천 번이라도 동의한다. 하지만 관계성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권력의 악랄함과 광포함과 야비함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도덕적 판단의 여지는 점점 사라진다.

10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 12 모두가 탈선하여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고,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독설이 가득하다.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르며, 16 파멸과 비참함이 그들의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한다.(롬 3: 10-17, 󰡔바른성경󰡕)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레비나스의 절규-우선 타인(他人)부터 돌보라 !
신의 죽음에서 성경 권위 해체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