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22-09-26 20:40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신과 계시로 묶어 주관적 현실성이 발생하여 교회를 이룸


칼 바르트는 교회를 기반으로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을 제시했다. 바르트가 제시하는 교회는 전통적인 교회 개념은 아니다. 바르트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실존이 실현되는 곳으로 규정했다. § 17.에서 다시 제시하겠지만 정통 교회의 교회관은 “불신앙으로 종교”가 될 것이다. 바르트에게 교회는 규범된 장소 개념이 아닌 신의 자유, 그리스도의 실존이 실현되는 장소이다. 그것이 실현되는 사람은 주관적 현실성(subjektive Wirklichkeit)이 발생한 것이다.

바르트는 이 부분에서(KD., 243ff, GG., 283 이후로) 계시의 객관적 현실성과 주관적 현실성의 관계를 제시한다. 바르트는 계시의 객관적 현실성이 우리 세계 안에서, 우리의 본성으로 이루어졌다고 제시했다(GG., 284). 바르트가 이해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준은 우리의 본성과 동일한 수준이다. 그런데 예수에게 발생한 계시의 현실성을 객관성(der objektiven Wirklichkeit der Offenbarung)으로 놓는 것은 바르트의 독단이다. 그 객관적 현실성에 근거해서 모든 사람에게 주관적 현실성이 발생할 수 있게 된다.

계시가 발생하는 것은, 초월적 전망에서 존재와 의미이다(Sein und ihre Bedeutung in dieser transzendenten Sicht). 객관적 현실성에서 신이 세상 안으로 들어온 것이며, 신의 발언이 계속된다는 의미이다. 바르트가 하나님의 은혜(die Gnade Gottes)를 말하는데, 바르트의 신학에는 죄 사함의 개념이 없는 은혜이다. 새관점학파에서도 유대교를 은혜의 종교(언약적 신율주의, covenantal nomism)로 규정했는데, 죄 사함의 개념이 없다. 은혜는 죄 사함이 첫 열쇠이다. 신학에서 십자가와 죄 사함의 개념이 선명하게 나타나는 것이 좋다. 죄를 사함 받음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죄 사함을 받은 의인에게도 매우 필요하다. 첫사랑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렘 2:2; 계 2:4-5). 십자가와 성령이 드러나는 것이 은혜인데, 바르트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신의 말씀이 드러나고 있다. 신이 지금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은혜라는 것이다. 바르트가 새로운 계시가 없다고 주장하지만(GG., 290), 바르트에게는 본래 한 계시가 변함없이 계속되는 구도이다.

바르트는 계시의 객관적 현실성을 도구적 기능으로 규정했다(GG., 284). eine geschöpfliche Wirklichkeit(피조적 현실성)에 감춰진 객관적 현실성이 신의 발언을 통해서 드러난다. 즉 형식은 피조적 현실성이고, 계시의 객관적 현실성이 전달되면, 계시를 보여줌, 계시를 증거함으로, 주관적 현실성이 이루어진다.

이때 바르트는 표적(Zeichen)을 말하는데, 이 표적은 보일 수도 있고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표적을 보는 피조적 인간에게 부여된 범위가 아니라, 신이 은혜로 부어주는 자유와 사랑에 있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이 도구를 대장장이의 손에 들린 망치와 가위 같은 도구가 아니라고 제시했다(GG., 284). 존 페스코는 이 부분에서 예정과 언약을 대장장이의 손에 들린 도구로 연결시키며, 바르트를 비판했다. 그러나 바르트는 표적을 만나고 이해하는 것은 신의 발언(Wort Gottes)이다. 표적을 보거나 증거하는 것은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가 아닌 신적인 설립과 인준(göttlicher Stiftung und Einsetzung) 위에서만 근거한다. 이 신적인 설립과 인준을 통해서 주된 피조적 현실성에서 구분되어 이전 존재와 다른 어떤 존재가 된다(GG., 285). 바르트의 이러한 구도를 성화는 오직 신의 자유와 사랑으로 가능하다고 주장되어질 문장이다. 그러나 그때 인간의 작용은 의미가 없으며, 오직 신의 활동만이 의미가 있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인간의 설교 행위도 신의 자유의 범주에서 결코 결정적인 위치에 있지 않게 된다. 즉 바르트가 하나님의 말씀, 설교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설립과 인준을 구도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바르트는 신이 인간을 자기 계시의 표징으로 묶었다고 제시했다(GG., 285). 바르트는 신과 인간이 묶어짐으로 신의 존엄성과 영광이 제한된 것은 아니라고 제시했다(GG., 285). 바르트는 신과 인간을 계시로 묶었다(bond, gebunden)고 표현했다. 칼빈은 그리스도와 우리를 성령께서 묶는다고 제시했다. 바르트는 신과 인간이 계시로 묶인 것이고, 칼빈은 그리스도와 신자가 성령으로 연합된다. 계시는 신의 자유와 사랑으로 수시로 내려오는데, 성령으로 연합된 신자는 주의 교회에서 선포된 말씀으로 믿음을 증진한다. 바르트에게 규정된 교회는 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구도가 된다. 신의 계시가 주관적 현실성으로 발생하는 공간이 교회의 객관성이 된다. 이때 바르트에게 죄 사함의 구도가 없이, 신의 자유가 제한되지 않는 범위에서 표징이 부여되어(Zeichengebung), 신과 계시로 묶어져서 주관적 현실성이 발생하여 객관적인 교회가 이루어진다.

바르트는 길게 이 부분을 성경적 근거가 있다고 제시했다. 그 제시 중 하나는 언약을 제시했다. 그 표징은 이스라엘을 선택한 언약이다. 바르트는 아브라함의 선택과 유대인들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와 심판을 받는 구도를 제시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의 메시아가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여 임마누엘을 성취하시는 구주이시다(마 1장). 바르트는 로고스 아사르코스(Logos asakos)를 표적으로 해소하고 있다(GG., 288). 구약시대에도 표적으로 그리스도와 연결시켰고, 그리스도가 나타남으로 표징 수여가 형식적으로 완료되었다는 구도이다. 그리고 사도행전적 예언과 기적도 그쳤지만, 표적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결국 로고스(Logos) 없이도 구약과 신약을 통일시킬 수 있는 기재가 ‘표적’(sign)이었다.

“확실하게도 이러한 표징의 수여는(이것은 물론 객관적 계시와의 가장 좁은 연합 안에 있다) 하나님의 행동으로써 하나님의 손에 도구들의 움직임으로써 이해되어야 하는데, 그 행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주님으로서 자유로우신 위치에 머무시며, 이러한 도구를 사용하심으로써 그분의 긍휼하심의 비밀은 결코 축소되지 않는다” Sicher muß diese Zeichengebung (so gewiß sie in jener engsten Zusammengehörigkeit mit der objektiven Offenbarung besteht) wie diese selbst als ein göttlicher Akt verstanden werden, als die Bewegung eines Instrumentes in der Hand Gottes, der ihm gegenüber der Herr und also frei bleibt, der im Geheimnis seiner Barmherzigkeit darum nicht kleiner ist, weil er sich dieses Instrumentes bedient.(GG., 289, KD., 248).

바르트는 이 부분에서 복음주의와 로마 가톨릭(evangelische und der r&#246;misch-katholische)의 개념과 다른 견해임을 제시했다(GG., 289). 바르트가 개념화시킨 교회는 기존의 교회와 전혀 다른 개념(현대 개신교적 교회 개념, modernistisch-protestantische Kirchenbegriff)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르트의 신학은 개인 사유 체계라고 밝히고 있으며, 개인의 사유를 따름과 정통 교회의 신학을 따름(사도적 가르침을 따름)으로 대조시키고 있다. 바르트는 객관적 계시의 행위, 하나님의 행위(Gottes Akt), 객관적 계시가 인간에게 다가오도록 하는 표징수여가 사도권을 설립하는 것이 표적의 존재 안에서의 행위로 규정했다(GG., 289). 바르트는 교회의 표지인 말씀과 성례로 표적부여(Zeichengebung)로 변환시키고 있다(GG., 289). 이 표적부여는 언제나 사람이 눈과 귀로 파악할 수 있는 신의 은혜의 도구이다. 그럼에도 바르트는 교회 안에서 수행되는 설교와 성례전에 대해서 명확하게 부정하지 못한다(GG., 290). 계시와 표적(sign)의 관계는 교회의 표지 개념과 비견된다. 바르트는 교회를 신의 계시가 주관적으로 현실적인 공간으로 규정했다(Die Kirche als der Raum, in welchem Gottes Offenbarung subjektiv wirklich ist, hat eben tats&#228;chlich diese streng objektive Seite, GG., 290, KD., 249). 신의 계시가 주관적으로 현실화된 공간은 신의 활동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객관적 측면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신의 계시가 주관적으로 현실화되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계시의 현실화를 이룬 예수와 차이점이 사라지게 되며, 예수보다 더 계시의 현실화를 높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게 된다. 도올 김용욱은 <나는 예수입니다: 도올의 예수전>(통나무: 2020)을 출판했다. 도올의 사색의 산물이 아니라 칼 바르트 울타리 아래에 있는 사색이다. 현대 기독교를 논할 때에 정통신학을 견지하지 않으면 반드시 바르트의 그늘에서 머물 수밖에 없다. 바르트는 바르트 자신이 원하지는 않았겠지만, 현대신학에서 주관적 현실성을 이룬 객관성을 가진 자가 된 것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한국성경연구원)
이메일 : ktyhbgj@hanmail.net

무엇을 함께하나?
섭리의 중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