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23-02-08 20:25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여호와부터 예수까지


여호와(Jehovah)는 구약성경에 7000회 이상(以上) 나오고 있다. “여호와”를 듣거나 보면, 지금의 신앙 풍토에서는 많은 사람이 ‘여호와의 증인’ 집단을 연상한다. “여호와”는 신약성경에 표현되어 있지 않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주제를 이루고 있다. 이 주제에서 여호와의 의미가 빠지면 도저히 하나의 주제가 나올 수 없다. 기도에서 제일 중요한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되고 있다. 이 아버지는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며 여호와다. 주기도문에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다”는 여호와로 기억되는 것이다. 지금 기도는 만병통치약으로까지 둔갑되었다. 주기도문은 대개 마지막으로 순서상 형식상으로 행해지고 있다. 주객이 전도(顚倒)된 경우이다. 한국 교회의 신앙생활이 왜 기도시간을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을까? 더 나아가 기독교의 중심이 기도에 있다고까지 주장하게 되었다. 여기에까지 이르러 기도를 무시하거나 부정하려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자 한다. 문제는 삐뚤어진 기도에 대한 관점에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뜻만 이해해도 기도는 해결된다. 하늘로부터 오시고 하늘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와 깊이 연관되기 때문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인간처럼 출생하여 죽는 존재가 아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죽이기도 살리시기도 하는 분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는 그의 아들이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이다. 21세기의 신앙풍토에서, 성경의 구절을 인용하여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식으로 또 아전인수(我田引水)격 등으로 써먹는 것이 만연(蔓延)되어 있다. 한국교회가 성경을 상고하고 상용하는 데 있어서, 그 대부분의 조류(潮流)는 부분적인 구절을 내세우고 인용하는 분위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구약성경 전체와 신약성경 전체를 개관(槪觀)하여 개괄(槪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개관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여호와부터 예수까지다.


1) 하나님 아버지인 여호와

“아버지”는 요한복음에 제일 많다. 성경을 보는 것은 진정한 관광(觀光)이다. 성경에서 진정한 빛인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만나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례로 2023년에 성경의 5대 명승지를 제시해 보았다. 성경 전체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 덩어리로 되어 있다. 이 영광을 관광하는 식으로 66권을 볼 수 있다면, 참으로 큰 의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진정한 아버지 여호와를 성경에서 만나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을 마무리하는 말라기 1장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가 아버지일진대”로 못 박고 있다. 5대 명승지로 구약성경에서 두 부분과 신약성경에서 세 부분으로 선정해 보았다. 창세기와 욥기(심장부), 시편(폐부)을 관광의 의미와 연계하여 강조한다. 신약성경에서는 마태복음과 요한복음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연결해 보았다. 요한복음에는 “아버지”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도 가장 많다. 이렇게 성경에 중요하고 핵심적인 문구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때, 성령 감동의 기록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다. 이 관광(sightseeing)은 빛을 보는 것이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빛이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天來)과 승천하시어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것(歸天)은 성경적인 여행의 본질이다. 하나님의 나랏일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신다고 성경이(눅 13:22) 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진정한 관광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를 함께 만나고 보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하나님 아버지와 똑같은 신성(神性)을 가지시고 오시고 가심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오시고 그분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왕래하고 있음을 두고서, “영광을 얻다”라고 표현하였다.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는 영광이 비치고 있다. 그 영광의 결정체가 바로 그 아들이다.


2)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연결에서 마태복음은 빠질 수 없다. 마태복음은 연결고리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은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름(name)은 바로 “여호와”이시다. 요한계시록에 많이 나오는 “어린 양”은 그 아들 예수다. 14장은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함께 기록하고 있다. 새 예루살렘 성(城)에서 성전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主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다. 여호와부터 예수까지는 성경전부이며 전체(全體)다.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은 하나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근호 목사 (논설위원, 중어중문학박사)
이메일 : yan8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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