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바르트의 신학 어휘, Wirklichkeit 이해 훈련
Wirklichkeit[비르크 리시 카이트]는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I/1권 첫 문단에서부터 등장해서, 꾸준하게 반복된 어휘이다. 이 어휘만으로 한 챕터를 구성시킨 것은 이 어휘를 이해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독일어 사용자에게 Wirklichkeit를 질문했을 때에 크게 긴장감 없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어휘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매우 긴장하며 이해를 시도하고 있다.
Wirklichkeit를 영어로 번역하면, actuality, fact, reality로 번역된다고 한다(캠브리지 사전). 영어권에서는 reality, real 등으로 번역되고 있고, 칼 바르트의 Die Kirchliche Dogmatik(1932년부터 1967년까지 12권(13권: IV/3-1, IV/3-2))를 번역한 Chruch Dogmatics에서는 reality로 번역했다. 영어 번역은 일관적으로 reality로 번역했다.
그런데 우리말 번역에서는 현실, 현실성, 현실(성), 활동하심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우리말 번역은 영어 번역과 달리 라틴어, 헬라어 등 모든 언어를 번역해서 좋은 점이 있지만, 다수의 번역자가 참여하면서 바르트의 어휘를 일관적으로 번역하지 못한 단점이 있다. 그중에서 Wirklichkeit도 일관성이 없는 사례에 포함되어 있다. 철학계에서는 진정성(Wirklichkeit)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먼저 영어에서 reality로 번역한 것은 Realitat를 번역한 것으로 연결되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보인다. 독일어권이나 영어권이나 우리나 실재, 실제, 사실 등의 명료한 이해가 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있음’, ‘재(在)’에 대한 이해이다. 그런데 ‘있음’에는 제(際)가 있다. 그래서 실재(實在)와 실제(實際)가 있다. 독일어에서 Realitat와 Wirklichkeit는 실재와 실제로 번역하는 것을 제언한다. ‘際(제)’는 ‘언덕과 접촉하는 것’을 나타낸다고 한다. 제(際)는 경계(境界)를 의미하기도 한다. 영어에서는 reality와 actuality(실재와 실제)로 번역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실재는 정지되었고 고유한 존재이고, 실제는 동적이고 발생적(사건)인 활성화되는 있음이다.
‘있음(有)’에 대한 사유는 철학이나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신학에서는 더 민감한 사안이다. 그것은 믿음의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믿음의 대상이 있음, 존재에 대해서 어떤 존재로 있는가에 대한 스콜라적 사유가 있었고, 가장 과격한 표현은 언어 개념에 있는 것으로 상상하기까지 했다. 최정호 박사는 피조된 언어, 타락한 언어를 매개로 하나님의 말씀, 진리가 전달된다고 했다. 그만큼 언어는 신비로운 도구이다. 언어와 많은 변이로 존재하는 언어에 대해서 인류의 지성은 해명하지 못한다. 언어는 계속해서 변이하며, 언어의 변이에 따라서 인류는 하나가 되지 못한다(창 11장). 그런데 인류는 언어가 아닌 탐욕으로 한 바벨탑을 쌓고 있다. 즉 언어의 분리에서 온 분열을 극복할 수 있는 탐욕의 매개체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맘몬(mammon), 물질에 대한 탐욕, 곧 ‘돈(money)’이고, 거기에 더해서 성(性)에 대한 무제한의 탐욕, 동성애 개방, 퀴어 신학(queer theology)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실재(實在)를 견지하는 데 반해,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실제, Wirklichkeit을 주장한 것이다. Wirklichkeit를 reality로 번역하면, 칼 바르트에게 하나님의 실재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actuality로 번역하면 ‘실재’로 번역하기 어렵다.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을 우리말로 번역한 현실과 현실성에 적당하게 연결된 영어 어휘는 actuality이다. actuality와 reality는 상호 교차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현재 용례인데, ‘있음’에 대한 부정확한 개념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예를 들면 유니콘은 실재할까? 그렇지 않다. 그러나 유니콘은 실제한다. 유니콘은 기호가 있기도 하고, 영향력이 있기도 하다. 그래서 실재하지 않지만 실제하기는 하다. 인간의 군상에서 적지 않은 미스테리는 실재, 사실에 의해서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특히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서양에서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교회만의 독특한 신(삼위일체) 존재에 대한 사실을 거부하는 사고 체계를 완성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신 존재는 믿는다. 고등인류이기 때문에 다신론이 아닌 유일신론 체계를 구축했다. 그 신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2018년 5월, 국민일보목회자포럼(대표회장 소강석 목사)에서 “현대신학에 신 존재가 있는가?”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가졌다. 발제자로 참여한 서철원 박사는 현대신학에 신 존재가 없음을 발표했다. 서 박사는 슐라이어마허에게 삼위일체 교리가 없기 때문에, 성육신 교리도 불가능하며, 그래서 신 존재는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칼 바르트도 전통적인 삼위일체를 대신해서 유일한 신적 존재에서 출발해 한 인격적 하나님을 주장해서 전통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으로 주장했다. 전통적 기독교 신관인 자존하시는 하나님(자존성)이 바르트에게 없고, 그는 행동이고 사건으로 있다고 제언했다.
전 한신대 총장 오영석은 “바르트는 그의 교의학(9000쪽 이상)에서 그의 모든 수많은 저서들과 논문들과 로마서와 요한복음, 빌립보서 성서주석들을 모두 살아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그리스도론적인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며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의 뿌리와 근거를 성서적으로 그 자신을 영원한 주 하나님 아버지로서,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영원한 성령으로서 논의한다. 특히 삼위일체론을 말하지 않고서 계시개념을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며 서 박사의 주장을 반박했다.<뉴스파워 보도 기사에서>
신의 존재의 유무(有無)를 판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중간에 실제(實際)가 있기 때문이다.
‘있음’은 “존재로서 있음”과 “의식에 있음”으로 구분된다. 존재로서 있음은 실재이고, 의식에 있음은 실제이다. 사유 체계에서 “존재로서 있음”과 “의식에 있음”의 차이에 대해서 분명하게 인지했다. “존재로서 있음”을 “존재 자체”로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동일한 사실을 보면서도 다르게 표현하기 때문이다. 코끼리 다리 만지기가 아니라, 같은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데,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ist(to be)에서 ‘발생(werden/become)’으로 변환시켰다. 대표적으로 성경관에서 등장했는데, 신관에서도 동일한 개념이다.
칸트는 진리의 Wirklichkeit를 제언하면서 진리의 상대성을 변혁시켰다. 헤겔은 Was vernunftig ist, das ist wirklichund was wirklich ist, das ist vernunftig으로 이성과 실제(현실적이고)를 순환시키면서 이성에 의한 절대정신으로의 지향성을 주창했다. 칼 바르트는 Wirklichkeit 어휘에서 칸트와 헤겔의 개념을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신학은 현대철학의 시녀라고 할 수 있는데, 기독교의 하나님이 없는 철학의 개념을 빌려 사용하는 현대신학에 신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마틴 루터에게서 Wirklichkeit가 있는데, 칸트의 개념과 다르다. 루터는 영적 현상, 비물질성의 실재를 표현할 때에 사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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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1권, I/1 읽기(4) 방대한 바르트 신학이 가는 방향: 종교다원주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