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6월 20일 (일) 

> 학술 > 철학 > 종교개혁 500주년 특집: 로고스의 운동력과 소피아의 대이동
기사공유 작성일 : 21-04-26 22:15  글자크기 크게글자크기 작게 기사 출력하기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서른넷.프랑스대혁명 후의 로마가톨릭의 발전:인본주의의 가속화
역사가 맥클로흐는 프랑스대혁명에 대해 평가하기를 “계몽주의가 꿈꾸던 이상이 갑작스럽게 그리고 폭력적으로 이루어진 실험이었다” 라고 한다. 계몽주의가 꿈꾸던 이상은 일인 독재의 왕정 권력과 교황 일인 지배의 종교 권력에서 완전히 벗어나 시민이 세계와 역사, 정치와 종교의 주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프랑스대혁명에서 드러난 시민정부에 의한 폭력과 살인의 상징인 단두대의 처형은 시민들이 주도하는 정부가 권력을 잡으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또 다른 경악의 상흔을 남겨 놓았다. 자유주의와 근대화를 표방하며 시작한 프랑스대혁명의 잔악무도함은 프랑스뿐 아니라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남미, 스위스에서도 적지 않은 상처를 남겼다. 그래서 혁명 세력들의 실패와 나폴레옹의 실각(失脚)은 당시 권력과 종교의 지형도를 다시 바꿔놓을 수밖에 없는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왕조 국가의 몰락으로 각 민족은 자신들이 원하는 정부를 조직하면서 가장 먼저 경계할 대적으로 의식했던 세력이 종교 권력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로마가톨릭은 대적 상대였다. 중세 1000년 동안 로마가톨릭의 종교권력이 시민에게 자행했던 억압과 폭력을 다시 반복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반면 각 민족들을 하나로 통합하기에는 신앙과 종교만큼 빠른 시간에 통합을 이루게 하는 것이 없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19세기 민족주의 전성기에 “교회는 민족주의적 자기 정체성의 중심”(135)이었다. 그리고 대주교와 수원원장, 주교들도 단지 귀족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는 직위를 유지할 수 없었으며 퇴출대상이 되었다. 국가의 운영 방식이 전문화하고 관료정치가 부상하면서 신처럼 대접받던 로마가톨릭의 주교들은 세속 정부에 대해서는 강한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로마가톨릭 세력들은 자신의 지위가 약화하자 귀족 중심의 권력자들을 떠나 다시 교황 중심의 권력구조를 만들게 된다. 이것이 프랑스대혁명 이후 민족주의가 발전하던 시기의 로마가톨릭 부흥 배경이 된다. 이른바 ‘교황권지상주의’(ultramontanism)의 부활이 일어난 시기다. 그리고 이 운동의 초기에는 로마가톨릭 세력 규합(糾合)의 목적은 교황숭배보다는 자신이 속한 교회의 재건과 부흥을 도모하는 데 비중이 더 컸다. 그런데 프랑스대혁명 이후 로마가톨릭 부흥운동은 여성들 중심으로 진행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교황권지상주의 페미니즘’(ultramontane feminism)(137)이라고 한다. 벨기에에서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엽까지 여성 수도사 비율이 늘어나 여성 60 : 남성 40으로 그 비율이 역전되었다. 이 운동은 이른바 성모 마리아 현현 사건과 직결된다. 프랑스 노르망디, 프랑스 파리, 독일 마핑엔 등에서 약 20회 이상 성모가 출현했다는 이야기로 인해 기념 성당들이 곳곳에서 생겼다. 그와 더불어 마리아 현현에 대한 논쟁도 극심해졌다. 이러한 경험을 했다는 자들은 대부분 여성들이었다. 1917년 포르투갈 파티마, 1981년 크로아티아에서 그런 일이 이어졌다. 이러한 자기 체험을 바탕으로 여성 중심으로 통합된 종교 에너지는 프랑스대혁명을 통해 로마가톨릭을 적으로 간주한 계몽주의자들과 맞서는 중요한 종교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교황권지상주의의 부활을 가능케 한 디딤판이 되었다. ‘기독교는 교황의 절대적인 권위 가운데 평화를 누린다.’, ‘교황의 주권은 본질적으로 무오하다(infallible)’(141)는 구호가 종교개혁 400년 만에 다시 부활했다.
18∼19세기 미국의 경우에는 가톨릭은 자체적인 독립성과 자유를 획득했다. 왜냐하면 미국 헌법은 가톨릭교도들을 보호해 주었기 때문이다. 북유럽은 평등사상을 앞세워 개신교와 가톨릭의 공정한 경쟁을 보호했다. 19세기 중엽 가톨릭이 자유롭게 성장했던 지역은 북미뿐 아니라 벨기에와 캐나다의 퀘벡이었다. 이러한 가톨릭 부흥의 결정적 사건이 발생한다. 1854년 마리아 숭배 사상이 유럽에 확산하자 당시 교황 피우스 9세(Pope Pius IX, 재위 1846-1878)는 교황 무오설은 물론이고 성모 마리아의 완전무오성도 선포한다. 마리아의 무흠잉태를 바탕으로 마리아의 완전무오성을 공표했던 것이다. 맥클로흐는 이 일을 “가톨릭교가 범한 시대역행적 결정적 오류”(146)라고 평가했다. 종교개혁 신학과 개혁파 신학을 통해 신학적 큰 문제가 있는 마리아 무오류성은 향후 가톨릭을 기독교 본질에서 더욱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교황의 무오설에서 이제는 마리아 무오설까지 19세기 이후 가톨릭은 비성경적인 인간이 만든 사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인본주의 사상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1858년 프랑스 피레네 산맥 루르드(Lou-rdes)의 시골 소녀 베르나데트 수비루(Ber-nadette Soubirous)를 시작으로 그곳에서 여러 차례 마리아 현현을 경험한 많은 여인들과 소녀들은 그것에 취해 자기도 모르게 강물이나 바위산에서 자신의 몸을 던지는 일이 벌어졌다.(147) 그런데 현재 루르드는 종파를 초월해서 ‘기독교인들의 메카(Mecca)’ 즉 성지로 불린다. 19세기부터 현재까지 마리아의 무오류성을 중심으로 행해지는 많은 행위들은 프랑스 대혁명과 제1차 및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톨릭교도들을 결집시키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1870년 이러한 가톨릭의 부흥을 등에 업은 제1차 바티칸공의회는 다시 한번 교황의 절대적 권위를 확정하는 무오설을 공포한다. “영원한 목자”인 “교황은 하늘의 구원자께서 원하시는 당신의 교회에 신앙과 윤리에 관한 모든 교리의 결정에 대해 무오성(infallibility)을 부여받았다”(148)고 공포했다. 당시 교황의 무오설을 반대하는 가톨릭 자유주의자들은 분노하기는 했지만 결국 지금 교황무오설은 로마가톨릭 사상의 중심 원리가 된다. 이뿐만 아니라 19세기 말 영국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대주교 핸리 매닝(Henry Manning) 추기경이 영국의 심각한 노동분쟁을 해결하면서 가톨릭의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있다는 깊은 인상을 영국 사회에 보여주었다.
하지만 앞의 모든 가톨릭 내의 실천들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무관하며 가톨릭은 분명 인본주의 사상에 기반을 둔 종교, 성경권위와는 무관한 종교임을 거듭 확인해줄 뿐이다. 이러한 시대의 가톨릭 사상이 조선 반도에 개신교보다 먼저 들어왔다. 하지만 이후 하나님의 섭리는 조선의 패망과 함께 우리 땅에 성경진리 중심, 하나님의 절대주권 중심, 교회의 유일한 통치자 주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이 뿌리내리는 무한한 신적 긍휼의 역사가 진행된다.

<208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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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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