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17-06-13 20:1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왜 칼 바르트인가?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바르트를 꼭 알아야 하는가? 꼭 알 필요는 없지만 모르면 어떤 것도 알 수 없는 중요한 위인이다. 바르트는 현대신학을 시작한 위인이다. 필자는 쉽게 현대신학을 1945년에 시작했다고 정의한다.

1517년, 중세 로마 교황주의를 믿음과 성경(sola fide et Scriptura)으로 개혁하여 신교(루터파, 칼빈파, 영국 국교회)를 형성했다. 개혁파 목사의 아들 슐라이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1834)는 18세기 계몽철학, 낭만주의에 대한 변호로 쓴 <종교론>으로 자유주의는 시작되었다. 슐라이어마허는 헤겔(G. W. F. Hegel, 1770∼1831)과 동시대 사람으로 헤겔을 압도했던 유력한 위인이었다. 슐라이어마허의 ‘절대 의존 감정’과 헤겔의 ‘절대이성’은 적대적으로 대립했을 것이고, 슐라이어마허가 당시를 주도했다. 그 당시 유럽에 프랑스 혁명(1789∼1794) 후 나폴레옹(1769∼1821)이 활약하고 있었다. 시대의 대 격변 속에서 유럽의 낭만주의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슐라이어마허에서 시작한 자유주의는 1945년 2차 대전 종전까지 100여 년을 진행했다. 또 다른 자유주의는 라이마루스(H. S. Reimarus, 1694∼1768)의 역사적 예수 탐구(historical Jesus)이고, 여러 신학자들이 우후죽순처럼 발생했다. ‘역사적 예수 Historical Jesus, 예수의 생애 The Life of Jesus’는 이성으로 예수를 탐구했다. 예수를 탐구하면 할수록 다양한 예수 모습이 등장했다.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가 <예수의 생애 연구사>(1913년)에서 학문적으로 예수 탐구가 불가능한 것임을 선언하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그럼에도 마지막 자유주의 학자 하르낙(Adolf von Harnack, 1851∼1930)은 기독교를 ‘사랑’으로 규정했다. 자유주의에서 ‘기독교와 예수 탐구’를 확립하지 못하고 좌초한 상태에서 1차, 2차 대전이 발생했다. 세계 전쟁에서 교회와 신학자들은 전쟁을 지지하며 기도하며 성원했다. 전쟁에서 낭만주의가 완전히 파멸했고, 인간 이성주의도 파멸했다.

16세기 중세 로마 교황주의는 교리를 포기했고 윤리도 망친 부패한 교회로 전락했다. 19∼20세기 자유주의는 교리를 파괴했고 윤리로는 지상낙원을 이루었는데 가장 큰 세계 전쟁을 일으켜 좌초되었다. 16세기 루터와 칼빈이 종교개혁을 성공했고 고대 교리를 회복했다. 그러나 회복된 교리 체계는 곧 세속화되었다. 세속화된 주요 요인은 경건주의(공동체 운동)와 재세례파(유니테리언)로 생각한다. 이들은 세련된 문체와 투명한 사상으로 유럽의 지성을 공략했다.
좌초한 자유주의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자유주의인 현대신학을 연 위인이 칼 바르트이다. 칼 바르트는 루터와 칼빈과 같이 시대를 변혁한 위인은 분명한데, ‘개혁(reformed)’인지 ‘과격한 세속화(radical secularism)’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세속주의’는 예수의 가르침이 세속적인 일상생활의 일상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다음백과사전).

전쟁에서 독일 루터파는 히틀러에 동조했고, 종전 후 홀로코스트에 대해 민족적 참회를 신학에 반영시켰다. 필자는 현대신학은 자유주의에서 더 급진적으로 세속화로 몰입한 체계라고 평가한다. 시대정신을 부합하며 선도한 가장 영향력 있는 위인이 칼 바르트다. 스스로 일으킨 세계 전쟁에서 유럽은 탈-기독교를 합의했다. 바르트가 동조해서 탈-기독교에 합당한 신학체계를 확립했고, 그 체계는 지금까지 유지되고 가장 큰 힘을 행사하고 있다. 칼 바르트의 신학은 로마 교회 칼 라아너(Karl Rahner, 1904-1984 /Foundations of Christian Faith, 1978)를  주축으로 해서 로마 교회 신학까지 변형시켰다. 종교다원주의를 확정한 2차 바티칸 회의(1962-1965)를 결정하는 중요 이론 체계를 제공했다.

칼 바르트 이후 어느 누구도 칼 바르트의 영향을 부인할 수 없다. 칼 바르트 이후 신학하는 학도는 칼 바르트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신학도, 그리스도인은 칼 바르트를 이해해야 한다. 쉽게 바른, 중도, 그른 신학자로 세울 수 있는데, 한국에는 중도가 많고 바른이 증가하고 있다. 우리는 칼 바르트를 자유주의를 개혁한 위인이 아닌, 자유주의를 더 세속화시킨 ‘그른 신학자’로 규정하고 증명하려고 한다.

학문은 ‘전제’를 세우고 ‘증명하는 방식’이다. 귀납법적 학문은 없다. 귀납법도 결국 자기 전제를 증명한 방식의 일환이지, 객관적 증명을 통해서 진리를 세울 수 없다. 칼 바르트 생전에 가장 강력하게 대립했던 학자가 반틸(Cornelius Van Til, 1895∼1987)인데, 그는 신학 방법을 ‘전제주의(pre-suppositionalism)’라고 했다. 학문과 인생에서 ‘규정’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규정’은 단죄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 증진과 교류를 위한 기본 수단이다. 우리의 글을 읽은 분들이 바르트에 대해서 ‘중간’ 규정이 아닌, ‘바른 혹은 그른’의 규정에서 읽어보자. 학문은 자유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 ‘믿음’에는 퇴보나 양보가 있을 수 없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칼 바르트 약전(略傳)
주 여호와에서 예수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