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18-05-02 20:01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칼 바르트의 주변 이해


바르트 신학의 전집을 일독한 신학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즉 찬성과 반대의 모두는 바르트 신학 전체를 읽어보지 않고 하는 것이다. 바르트의 신학 전체를 읽어보지 않고 찬성하는 것과 반대하는 행위는 동일한 오류에 있는 것이다. 전집을 모두 읽었다 할지라도 신학 전체를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결국 바르트의 사상에 찬성과 반대를 하는 것은 부분적인 지식과 불완전한 수준에 있다. 그래서 판단을 유보하자는 견해가 있다. 학자적 양심으로 판단을 유보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나 교회의 사역자로 급변하는 교회의 상황에서 긴박한 판단을 해야 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 바르트를 칭송하는 발티안이 바르트적으로 목회를 하겠는가? 급진적인 몇 교회를 제외하고는 ‘성경에 대한 권위’와 ‘영생’에 대한 소망을 말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 상황과 바르트를 혼합한 것이나, 한국교회 상황에 바르트를 거부하는 것을 혼합하는 상황은 동일하다. ‘믿자고 덤비는 행동’과 ‘생각해보자고 분석하는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전자를 택할 것이다. 그렇다면 바르트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바르트 사상을 독서하는 것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첫째 유럽의 철학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의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세 사상까지 총망라한 대작이다. 기독교사상과 철학사상까지 망라된 작품이다. 즉 그러한 배경적 지식이 없을 때에는 진위를 구별하기 어려운 미로(迷路)에 봉착하게 된다. 특히 한국의 지식 환경은 철학 기반이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바르트 사상 이해에 더욱 난점을 갖고 있다. 바르트의 글을 읽으면 반드시 미로에 들어가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 미로에서 나오는 방법은 단 하나, “정통신학”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정통신학”을 사랑해야 한다. 바르트의 대부분은 글을 정통신학을 제시하면서 전환하는 내용이 많다. 둘째 많은 분량은 독서에 무리가 있다. 많은 분량은 저자의 핵심 주장을 잃어버리게 한다. 셋째 독일어를 영어나 한국어로 번역할 때 오는 부적당한 번역에 있다. 한국어 번역에서는 다양한 번역자들이 번역을 시도하여 용어에서 통일성을 갖지 못하였다. 그래서 독일어를 읽지 않는 이상 독자는 독서의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자유주의와 현대주의(신정통주의)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자유주의’와 ‘현대주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발티안들은 바르트의 업적으로 자유주의를 극복한 위인으로 평가한다. 즉 자유주의와 현대주의가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주의와 현대주의의 차이는 무엇인가?
혹자는 자유주의는 내재주적이고 신정통주의는 초월적이라고 제시하기도 한다. 초월(超越)을 지구 밖, 혹은 이성의 외부의 어떤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세계 혹은 우주, 인간 내면에서도 초월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자유주의는 ‘이성으로 기독교 재검증’한 것으로 본다. 그런데 100년의 역사적 예수 탐구에서 검증에 실패했고, 오히려 많은 의견만을 양산해 버렸다. 현대주의인 신정통주의도 ‘이성을 넘어선 세계를 인정’하는 특징이 있는데, 다시 그것이 이성의 기능으로 감지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고 검증되지 않는 것은 거부한다. 이성을 넘어서기 때문에 믿음과 ‘하나님의 자유’, 혹은 ‘계시’를 접촉점으로 설정하였다. 즉 자유주의는 계시를(역사적 예수) 이성으로 검증했다면, 신정통주의는 계시가 계속됨으로 믿음으로 이성이 검증하여 인식하면 되는 것이다.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의 공통점은 ‘예수’라는 위인이 갖는 인격의 신비이다. 그 인격은 ‘감화력’으로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의 종교가 어떻게 세계 종교가 될 수 있었는가?에 대한 탐구라고 본다. 자유주의는 예루살렘에서 현재로 탐구했다면, 신정통주의는 현재에서 미래를 탐구하는 자세라고 본다. 그래서 신정통주의에서는 과거의 모든 것을 제거하는 결단을 촉구한다. 자유주의에서 합당한 체계를 정립한 것을, 신정통주의는 정통신학을 제거하고 자유주의에 합당한 정통신학과 계몽철학 그리고 신비주의를 결합시켜 합리적인 체계를 만들었다. 이 체계에 다양한 현대신학이 양산되었다. 몰트만, 판넨베르크, 로마 교회의 카알 라아너 등은 바르트 신학 체계에 더 많은 가지를 만든 위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정통신학(Orthodoxy Theology)이란 무엇인가?
바르트의 신학에서 ‘개혁신학’은 변별력이 없다. 발티안에서 ‘개혁주의’를 주장하는 학자들도 상당수 있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개혁신학은 16세기 존 칼빈에서 시작된 것으로 바르트와 연결성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다(맥그래스 등 다수). 바르트는 개혁신학에 대한 개념은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루터와 칼빈 그리고 당대의 종교개혁자들을 자유롭게 인용한다. 필자의 독서로는 루터의 인용에는 긍정적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칼빈의 인용에서는 많은 부분에서 부정적인 자세로 보인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바르트와 루터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고, 칼빈과 비교된 논문만 상당수 있다. 칼빈의 후계자로 주장하려는 경향이 있다.
필자는 바르트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정통신학’에 대한 확립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정통신학의 가치가 흔들리면 바르트 신학의 미로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 바르트의 글을 감동과 위력을 갖는 대단한 문체로 평가한다. 섣불리 접근하면 그 문체의 힘 혹은 많은 양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정통신학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있다면, 정통신학이 아닌 신정통신학 문체의 이질성을 금방 느낄 수 있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진리의 주요한 특성
하나의 복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