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25-11-11 11:09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일흔둘. 보에티우스의 영원: 무한과 순간의 동시


신적 계시와 합리적 이성의 조화를 시도한 보에티우스는 향후 중세 스콜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특히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의 사상 수립에 그 전제를 제공한다. 신론, 섭리론 그리고 자유의지론에 큰 영향을 미친다. 신론과 관련해서 보에티우스는 하나님의 존재를 ‘영원(eternitas)’ 개념으로 설명한다. ‘철학의 위안’에서 보에티우스는 하나님을 ‘영원(eternitas) 자체’로 정의한다. 영원을 하나님으로 대체하면 그가 합리적 추론으로 이해한 하나님의 뜻을 짐작할 수 있다. 그에게 영원이란 ‘끝이 없는 삶을 전체로서 동시에 완전하게 소유함’이다. 단지 끝없는 시간이 영원이라는 말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하는 존재 방식’이 영원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반드시 시간의 흐름 속에서만 자기 존재를 경험한다. 그러나 어제는 이미 지나가서 기억으로 남을 뿐이므로 오늘에는 없는 것이며 오늘은 지금의 순간만을 찰나로 경험할 뿐이고 내일은 단지 기대나 예측으로 상상할 뿐이다.

그렇다면 순차적 시간(successio temporis) 속에 제약당하는 인간 존재가 어떻게 ‘영원’을 포착할 수 있단 말인가? 보에티우스는 영원은 과거·현재·미래를 모두 동시에 ‘지금’으로 파악할 때 가능하다고 추론한다. 인간은 순차적 인식 구조를 가지고 ‘맨 앞-중간-맨 뒤’ 사람을 헤아린다. 그런데 높은 탑 위에서 사람들의 행렬을 내려다보면 맨 앞-중간-뒤를 ‘동시에’ 한눈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시간 밖의 관찰자’가 된다는 것이다. 인과론 중심의 사유 방식을 벗어난 이러한 사고는 ‘전체가 동시에 현재인 인식’ 방식이다. 하나님께는 과거·현재·미래의 구분이 순차적 시간 흐름이 아니라 ‘동시성이 지배하는 존재 질서(ordo essendi)’로 통일된다.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존재 질서’라는 표현은 하나님과 피조물의 존재 방식의 차이를 전제로 한다. 인간이 경험하는 시간은 ‘흐름(ordo temporis)’이다. 존재론적으로 보면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며, 현재는 지금 찰나로 존재하는 것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인간의 모든 인식과 존재는 바로 이러한 시간의 제약 안에서만 가능하다. 하나님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은 ‘무한성(無限性)’을 본질로 한다. 하나님께는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사건이 동시적으로 ‘현재화’한다. 즉 하나님 앞에서 모든 시간은 ‘현재’다. 이때 필요한 개념이 ‘존재 질서’라는 개념이다. 이 질서에는 모든 만사 만물이 시간의 선후를 초월하는 ‘존재의 위계질서’를 형성한다. 가령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 역사 속에서는 약 2000년 전의 과거 사건이다. 하지만 하나님에게는 여전히 오늘을 지배하는 ‘현재의 실재’가 된다. 단순한 과거 기억이 아니라 ‘하나님 구원의 초월적 능력이 시간 세계를 철저하게 지배하는 새로운 차원의 존재 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사건’이 된다. 변화와 과정과 소멸에 매몰당하는 현재가 아니라 동시성과 무한성과 불변성이 지배하는 차원이다. 내일은 단지 다가올 것이라는 예측을 뛰어넘어 이미 ‘내일’이 현재로 존재하는 가능성이 열리는 차원이다.

창조주 하나님께 이미 ‘내일’이 현재로 존재한다는 말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무한한 존재 곧 영원한 존재에 관한 진리를 설명하는 표현이다. 하나님께 현재는 언제나 ‘영원한 현재’이며 이는 모든 시간의 흐름을 포괄한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 미래인 것도 하나님에게는 ‘이미’ 실제로 존재하는 현재다. 가령 하나님의 약속은 미래 예언이 아니라 시간 초월의 영원 세계 속에 이미 현재화가 일어나는 사건으로 이해된다. 가령,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 90:2)와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시 90:4)에서 보듯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그리고 ‘천년=지나간 어제=한순간’의 도식에서는 ‘찰나’와 ‘무한’의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이 아무리 길어도 순간에 모두 거품처럼 사라질 수 있으며, 하지만 아무리 짧은 순간이라도 영원한 세계의 총체적 경험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앞서 말한 ‘내일도 이미 현재로 존재하고 있다’는 표현이 가능해 보인다.

이러한 사유는 시작과 마지막을 구분하지 않는 통찰을 필요로 한다.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 46:10)에서 보듯이, 창조주 하나님께는 ‘시초=종말’의 구분이 없다. 피조물에게 미래인 것이 하나님께는 ‘이미’ 알려진 현재가 된다. 하나님의 정하신 뜻은 시간 속에서 변화하거나 늦어지지 않고 모든 시간적 사건을 ‘영원의 현재화, 현재의 영원화’로 표현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겪지 않은 일도 이미 알고 계시며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는 이미 실제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책을 편 독자인 나는 책을 한 장씩 읽어 간다. 1장을 읽을 때 2장, 3장 내용은 아직 모른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창조주 하나님은 책 전체를 이미 완전히 보고 계신 저자이면서 동시에 독자와 같다. 분명 그 책은 1장(과거), 10장(현재), 마지막 장(미래)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책을 ‘동시에’ 펼쳐서 보신다. 우리의 시간 관념으로는 ‘내일’은 기다림의 대상이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그 내일’이 표시되는 순간 ‘이미’ 현재가 된다. 이로써 하나님은 역사를 ‘예측’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모든 시간을 이미 ‘보고 있는 존재’ 즉 ‘영원한 현재 속에 있는 예지적 존재’다. 이런 시각에서 다시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약 2,000년 전에 일어난 과거 사건이 아니다. ‘이미 보고 있는 전지의 예지적 존재’인 하나님께는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은 ‘항상’ 현재의 실재가 된다. 시간 속에서 한 번 있었던 사건이지만, 하나님께는 현재 계속 신적 능력을 계시하는 존재론적 실재가 된다.

이렇게 보에티우스는 ‘합리적 이성’을 통해 모순 어법까지 동원하면서 황제가 내린 사형 날짜를 기다리며 영원 개념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숙고하면서 영생에 대해 확증하고자 했다. ‘영원은 시간의 연속 없이 한계 없는 생명을 전체로서 동시에 완전하게 소유하는 것’이라고 요약한다. 그에게 ‘영원’은 무한히 긴 시간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존재의 방식 그러한 존재의 이름 곧 ‘하나님’이다. ‘계시’ 없이 합리적 추론으로 만들 수 있는 신이 어떤 경우인지 우리는 신적 개념의 상호 얼개를 조금 복잡하게 생각해 보았다. 철학적 논리로 신학적 진리를 이성적으로 논증할 수 있다는 그의 확신과 추론을 보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은혜와 믿음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계시 신학은 단지 언어적 정보의 논리적 추론 차원이 아님을 더 깊이 고민하게 된다.



<282호에서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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