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 셋. 보에티우스의 명암: 변절자인가 변증가인가
“죽음에 직면한 고요한 영혼은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철학자들이 존경을 갖고 읽을 만한 자로서 서방 목회자들과 학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앞의 인용은 역사가 맥클로흐가 보에티우스를 역사적으로 평가한 부분이다. 맥클로흐의 서술로 볼 때 보에티우스는 창조주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 성경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 않으면서 섭리와 운명, 죽음과 행복과 최고선을 논리적으로 엄정하게 다루면서 기독교의 본질을 전달하려고 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기독교 교리를 따르지 않더라도 존경할 수 있는 기독교인이 보에티우스라는 역사적 평가가 따른다.
이러한 보에티우스의 독특한 위치에 대해 논란이 있다. 먼저 보에티우스는 신플라톤주의의 언어와 구조를 적극 활용한 기독교 신학 사상가라는 평가다. 물론 그는 순수한 신플라톤주의자는 아니다. 하지만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 사상의 개념들을 분명히 사용하고 있다. 최고선(Summum Bonum), 악의 실체 부정, 악은 선의 결핍, 영혼의 상승, 시간과 영원의 구분, 섭리와 운명의 위계적 질서 등이 그러한 개념들이다. 이는 ‘플로티노스–프로클로스 계열’의 신플라톤주의 도식을 상기시킨다. 이들 신플라톤주의는 단일한 철학 체계라기보다 세계와 구원, 악과 참 지식을 체계와 구조로 설명하는 패턴이라고 할 수 있다. 플로티노스가 확립하고 프로클로스가 체계화한 신플라톤주의는 삼중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일자(一者, One)-정신(Nous)-영혼(Psyche)’ 구조다. 일자는 절대적 단일성으로서 이성을 초월한 근원이며 선(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정신은 이데아의 세계로 지성적 질서를 뜻한다. 영혼은 세계 영혼이 개별 영혼으로 구체화하며 물질계의 질서를 가능케 한다. 이 구조에서 모든 존재는 창조가 아니라 오직 필연적 유출(emanation)의 지배를 받을 뿐이다.
그리고 신플라톤주의는 악을 비실체(privatio boni)로 본다. 선의 결핍인 악은 독립적 원인이 될 수 없으며 세계 전체는 본질적으로 선하다. 이러한 구조에서 신의 선성(善性)과 세계 질서는 양립하면서 동시에 보존된다. 또한 신플라톤주의는 ‘섭리(providentia)/운명(fatum)’ 이원론 구조를 주장한다. 섭리가 상위 차원의 지성적이며 영원한 질서라면, 운명은 하위 차원의 시간적이며 인과론이 지배하는 자연계의 질서다. 그런데 섭리와 운명은 대립 관계가 아니라 위계적 포함 관계다. 위계적 포함 관계란 상위의 원리가 하위 원리를 부정하거나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근원적 차원에서 하위 체계를 포함시키고 질서를 더욱 견고하게 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지성적 차원의 영원한 단일한 질서로서 역사를 초월해 전체를 총괄하는 ‘섭리’는 연속적 인과계열의 변화와 우연의 ‘운명’ 세계를 늘 포함한다는 것이다. 운명은 섭리 안에 있으며 섭리의 구체적 구현 방식이며 나아가 시간 세계를 가능하게 드러나는 방식이다. 이것이 대립 관계일 수 없는 이유는 만약 대립관계라면 섭리 아래서는 우연한 세계를 설명할 수 없으며 운명만 강조하면 초역사적 섭리 차원은 무력화하고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세계 설명 방식이 보에티우스의 설명 방식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보에티우스에게 하나님은 전체를 모두 아시고 섭리하면서 인간은 운명 속에서 사건을 경험한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운명 안에 있지만 섭리 바깥으로 밀려나지 않는다. 이것은 신플라톤주의에서 말하는 위계적 포함 구조다.) 이처럼 상위 차원의 원리(섭리)가 하위 차원의 질서(운명)를 제거하지 않으면서 더 넓은 의미 체계 안에서 원인과 근거 나아가 완성을 가능하도록 감싼다.
그리고 신플라톤주의에서 말하는 구원은 인식을 통한 지적 상승이다. 영혼은 자기 본성에 대한 순수한 인식을 통해 상승한다. 이를 완성하고자 덕성 함양과 심오한 관조 그리고 정교한 지성의 훈련이 필요하다. 신플라톤주의에서 말하는 구원은 ‘은혜’ 사건이 아니라 지성의 회복 사건이다. 보에티우스는 ‘철학의 위안’에서 앞의 신플라톤적 구조를 사용하면서 지적 구원의 도식을 만든다. 최고선(One), 우주의 합리적 질서, 악의 실체 없음, 섭리-운명의 포함 관계, 행복에 대한 참된 인식과 영원 상승은 신플라톤주의의 유산이다. 보에티우스는 이러한 프로클로스 위계 도식을 라틴 기독교에 안착시키려는 시도를 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의도가 ‘철학의 위안’을 만들었으며 진정한 철학은 ‘위안의 언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그래서 보에티우스를 기독교 신학자로 보려는 자들은 신플라톤주의 도식을 빌려 그리스도가 ‘침묵’하는 자리에서 철학적 언어로 인간을 위로한 기독교인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모르는 철학자들을 위한 선교적 텍스트를 마련하고자 했으며, 교회 내 지식인들에게 유익한 지적 훈련서를 제공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명시하지 않고도 기독교 진리를 철학의 최고 수준에서 증언하고자 했던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이교 철학자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었으며 중세 수도사들에게는 경건의 스승으로 자리매김했다. 나아가 서방 교회 목회자와 신학자에게 성경과 철학, 계시와 이성의 ‘교차점’을 만들어주었다. 철학자의 눈으로 보면 철학이 신학에 굴복하지 않으면서도 신학에 봉사할 수 있을 것인가를 증명하고자 했던 고대 기독교 신학자의 마지막 인물처럼 보인다.
보에티우스가 신플라톤주의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세속의 철학자가 아니다. 가령 삼위일체 관련 논문, 그리스도의 두 본성 교리에 관한 연구 나아가 아리우스주의 비판을 보면 그의 사상은 신플라톤주의자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교리를 설파하고 있다. 신플라톤주의의 핵심 사상과 선명하게 충돌한다. 가령 신플라톤주의에서 세계는 필연적 유출 사건이며 악은 구조적으로 불가피하고 구원은 오직 지적 상승 과정이다. 하지만 보에티우스에게 세계는 창조주의 자유로운 창조이며 악은 피조물의 도덕적 무책임의 결과다. 또한 구원은 이 땅에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인격적 섭리와 오직 은혜의 질서 안에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에티우스에 대한 비판은 간과할 수 없다. 가령 칼 바르트의 시각에서 볼 때, 보에티우스는 ‘철학이 신학을 위로하는 구조’라는 오해를 떨칠 수 없다. 이성이 신적 계시의 주권을 침식할 우려가 크다. 창조주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만 알려지며 인간은 오직 은혜로만 그 지식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보에티우스는 철학(이성)이 독자적으로 섭리와 최고선 그리고 행복 개념을 통해 구원을 대체하는 ‘위로’를 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제3의 길처럼 보이는 이러한 보에티우스는 바르트 눈에는 ‘위험한’ 신학적 사유다. 피조물인 죄인인 인간을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하나님은 합리적 이성을 정교하게 발전시켜서 지적 상승을 통해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바르트에게는 계시와 이성 사이에 ‘중립적 언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에 대해 침묵하면 이방신을 말하게 된다. 보에티우스는 서구 교회사의 자산일 수는 있지만 동시에 계시와 이성의 위험한 경계선이 되고 있다.
<284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