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탐구로서의 교의학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I/1 읽기(20)
『교회교의학 I/1』 § 1.2 “탐구로서의 교의학”을 간략하게 살피고 있다. 먼저 바르트는 교리(Dogma)를 “진술에서 추구된 올바른 내용”으로 규범화했다(GG., 37). 우리는 교리를 삼위일체(325년 니케야 공의회,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와 그리스도 양성교리(한 위격에 두 본성, 431년 에베소 공의회, 451년 칼게돈 공의회), 고대 공의회에서 결정된 내용을 말한다. 그래서 교리는 정통과 이단을 규정한 문서이다. 바르트는 교회가 결정한 이단에 대해서 재검토를 해야 한다는 의견을 갖는다. 그것은 고대 시대의 사고 체계가 미숙하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교회의 결정을 상대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우리는 451년 칼케돈 공의회까지 결정을 절대적으로 평가한다. 세례 문답에서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은 교리 내용을 고백하는 것이다. 참고로 종교개혁 당시 루터파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 고백했는데, 20세기 칼 바르트 등의 영향으로 주와 구주로 고백한다고 한다. 미국 장로교회는 칼 바르트의 영향을 받았지만, 세례 고백 문장을 유지하고 있다. 세례 고백 문장을 유지하는 것은 고대 교리의 가치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바르트는 § 1.2 “탐구로서의 교의학”에서 교의학의 가능성(can)과 당위성(must)을 제시했다. “올바른 내용”(교리)에 대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시도할 수 있으며, 당위성이 있기 때문에 도달의 가능성이 있다. 바르트는 인간 예수에게 신이 오심을 초기부터 마지막까지 유지하는 계시 활동 구도이다. 칸트가 인간의 선험성을 토론 없이 규정한 전제이듯이, 바르트도 인간 예수 그리스도에 신이 부여한 계시 방식이 모두에게 토론 없이 유효한 전제로 규정했다. 칸트와 자유주의는 인간의 합리성에 기초하지만, 바르트의 신학은 신의 초월적 행동이 인간 예수 그리스도에게 객관화된 것으로 규정했다. 인간 예수에게 규정함으로 인간 이성으로 신학을 구성할 수 있는 초월적 신을 규범화시킨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믿음의 유비(analogia fidei)라고 했다. 바르트가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주어진 선물이 아닌 인간 예수를 기준으로 한 확신이다. 바르트에게 은혜가 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은혜를 죄사함으로 규정하면 다른 면이 될 것이다. 바르트에게 죄사함은 그리스도의 피의 속죄제사 방식이 아니다. 뒤에서 살피겠지만 바르트는 죄인을 향해 오는 신의 행동을 은혜로 규범화하는데, 우리는 죄인에게 전도자가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그 복음을 영접하는 것이 은혜의 선물, 믿음이라고 한다. 우리는 죄인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가 영접하는 믿음을 은혜라 부르지만, 바르트는 그 죄인이 복음을 듣기도 전에 하나님이 그를 향해 오는 그 발걸음 자체를 은혜라 규정했다.
바르트는 § 1.2 “탐구로서의 교의학”에서 교의학의 당위성(must)을 제시했다. 이 부분에서 바르트의 진리 개념이 드러난다(GG., 40). 바르트는 “진리는 도래한다(Truth comes)”고 제시했다. 그것은 낙관적인 세계관이지만, 현재 진리보다 미래에 확보된 진리 개념이 더 합당하다는 미완의 진리 개념이다. 바르트는 이 부분에서 “십자가 신학(theologioa crucis)”을 언급하며 인간의 노력을 배제하는데, 마르틴 루터의 개념을 부분만 채택한 것이다. 칼 바르트가 십자가 신학을 유지한다고 분석한 신학자는 없다. 바르트는 숨어계신 하나님(Deus absconditus)도 사용한다. 그래서 필자는 칼 바르트와 존 칼빈의 연속성을 연구할 것이 아니라, 마르틴 루터와 연속성을 연구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제언한다. 2024년 박재훈이 신학이 아닌 윤리 분야의 제목 “교회와 국가의 관계성 연구 : 마르틴 루터와 칼 바르트를 중심으로”로 박사학위(웨스트민스터 대학원)를 취득했다.
바르트는 계시의 점진성과 유사한 개념으로 계시가 좁은 길을 간다는 표현을 한다(GG., 41). 계시의 점진성은 성경이 충족된 후로 점진성이 아닌 종결성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바르트는 하늘로부터의 음성(vox de coelo, verbum Dei)을 믿는다는 명목으로 계시의 무한한 점진성을 주장한다. 바르트는 로마 가톨릭과 옛 프로테스탄트를 대조시켰다(GG., 41). 로마 카톨릭은 성경과 전통을 같은 가치로 놓기 때문에 계시가 계속되는데, 옛 프로테스탄트는 성경 66권의 충족성을 명확하게 견지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확정된 정경(Closed Canon)에 근거한 신학이 아니라, 계시가 점진적으로 증진되는 교의학으로 계시의 진리들(Offenbarungwahrheiten)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증진한다고 주장했다(GG., 41). 바르트는 “미래적인 신의 결단”을 예측하고 예단하는 것을 금지시켰다(GG., 42). 과거의 결정을 반복한다면 미래에 신이 행할 결단을 제약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가 굳게 세웠던 하나님의 불변성(Immutability)을 견지한다면, 과거에서 행했던 하나님의 결정은 미래에도 변함없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보아야 한다. 바르트는 루터의 ‘자유’ 개념을 가져왔는데, 루터는 죄로부터 자유였는데 바르트는 모든 규범에서부터 탈피하는 자유로, “미래의 불확정적 개방성”으로 밀어붙였다. 그러나 루터는 죄사함으로부터 자유, 죄사함을 주신 하나님의 불변성에서 구원의 확실성을 규범화했다.
바르트는 “하나님에 관한 우리 진술의 정초로서의 성서적 가르침에 대하여 묻는 것이 주석신학이다”라고 했다(GG., 42). 바르트의 명제는 주석학 작업으로 새로운 교리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서적 주석이 되었다면 그 가치에 성서적 권위를 부여하겠다는 것이다. 바르트가 “믿음의 유비”와 “성서를 통한 증언”을 강조하기 때문에 “믿음과 성경”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바르트가 “믿음과 성경”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인데, 그 “믿음과 성경”이 우리가 개념화한 믿음과 성경인지를 분별할 것이 요구된다. 현대신학의 난점은 언어가 동일한 것이다. 자유주의는 다른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분별하기 용이했지만, 현대신학이 사용하는 용어는 고대교회 신학, 종교개혁신학의 용어와 동일하다. 그리고 고대, 종교개혁신학이 범한 오류를 예리하게 지목하며 설득하기 때문에 현대신학이 사용하는 고대교회 용어에 갇히게 된다. 우리는 앞에서 간략하게 바르트가 사용한 ‘믿음’이 같지 않음을 제시했다. 성경도 같지 않다. 바르트는 무한한 해석적 자유를 제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교리의 범주를 벗어난 해석을 용인할 수 없다. 최근 어떤 주석가가 “십자가 3일의 복음의 신비”를 개념화시킨 것에 대해서 신학자들이 새로운 해석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새로운 해석이 찬사를 받는다면 가장 탁월한 성경 해석가는 계시 권위를 갖는 이만희가 될 것이다. 칼 바르트적 성서적 주석을 인정하는 주석가가 이만희 성경 해석의 독특성을 독창적이라고 인정할까? 왜 이만희 성경해석을 거부해야 하는가? 그 판단을 자기주관성에 근거해서 수행한다면 정치에 불과하다. 복음, 교회의 가르침은 진리에 기반한다. 그런데 바르트처럼 미래로 가는 진리 개념으로는 어떤 해석에 시비적 규정을 하는 것은 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사이비의 폐단성도 “그때는 틀렸지만 나중에는 옳을 수 있다”. 이단들은 복음의 요소, “박해받는 진리”를 자기화시켜 진리에 응전한다.
바르트의 제시처럼 성경적 진술을 기독교적 진술이라고 하고, 거기에서 어떤 바른 내용을 취득할 수 있도록 개방시킨다면, 이단이 이단이 아니고, 정통이 정통이 아닌 부정신학 체계에 들어간다. 바르트가 말하는 무한한 겸손은 결국 이단을 영접하는 관용이 된다. 즉 성서에 기초를 두고 이단을 용인하게 된다. 자유주의 신학자 리츨(Albrecht Ritschl, 1822-1889)은 신약성경에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문장이 없다고 말하면서 불신지옥을 거부했다.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배타적이고 형벌적 교리는 리츌이 상정한 ‘하나님 나라의 윤리’에 부합하지 않는, 후대의 가설이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했다. 자유주의나 현대신학은 오직 성경의 원리를 벗어나지 않지만, 오직 성경이란 구호로 이단적 주장을 서슴지 않고 공표한다.
1968년, 68혁명의 명제 “혐오를 혐오하라(Hate hate)”는 명제에서 세계는 극단적으로 변혁되었다. 1968년은 칼 바르트가 별세한 시간인데, 그 시간에서 발생한 68혁명은 바르트의 사상을 더 극단적으로 펼쳐진 것으로 보인다. 1947년에 발명된 트랜지스터가 활성화된 1970년대 세계는 1900년 현대가 시작된 후 정신적이고 물질적으로 전혀 다른 세계가 되었다. 그 현대정신에 부합된 종교신학적 체계를 칼 바르트가 제공하고 있다. 우리는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항구적 진리(Philosophia Perennis), 고대정신과 변함없는 현대정신 체계를 추구하는 정통주의를 추구한다. 현대 사회에서 정통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진리 개념, 진리 불변성(Immutability of Truth) 개념을 갖고 있어야 한다. 고대사회에도 사람은 먹으며 살았고 먹지 못하면 죽었고, 최첨단 디지털 사회인 현대사회에도 사람은 먹어야 살고 먹지 못하면 죽는다. 죄사함의 은혜가 없는 사람은 죄짐 아래서 현대사회가 제공하는 여러 편의로 평안함을 누릴 것이다. 죄사함의 은혜가 있는 사람은 죄짐을 벗어나 현대사회가 제공하는 여러 편의가 제공하는 평안이 없지만 십자가 아래에서 평안을 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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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
탐구에서 인식할 수 있는 계시내용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