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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12-20 21:02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나는 나의 신앙을 고백한다 - 송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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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폰테스(Ad Fontes)’는 ‘기본으로 돌아가자(back to basic)’는 의미의 라틴어다. ‘아드폰테스’는 라틴어 성경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에 등장한다. 라틴어 ‘아드(ad)’는 영어로 전치사 ‘to’이며, 폰테스(fontes)는 원천(fountains) 또는 근원(sources), 기본(basics)을 뜻한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던 중, 신앙이 가장 근본적인 것이고 이 신앙이 한 정치인의 인생 여정에 기초와 핵심이 된다는 사실을 송미령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송미령을 잘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의 인생은 신앙인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역사의 흔적을 남긴 위대한 기독교 여성 지도자 중 하나였다. 

중국의 역사에서 새로운 근대 국가를 수립한 3대 주역으로 국부인 손문과 국민당의 장개석, 그리고 공산당의 모택동을 언급할 수 있다. 이 3인 중에 손문과 장개석이 송가수(宋嘉澍)라는 한 집안과 결혼한 사실이 특이하다. 손문의 부인은 송경령이고, 장개석의 부인이 송미령(宋美齡, 1897-2003, Soong May Ling)인데, 이들은 모두 송가수의 딸이다. 송가수의 셋째 딸 송미령은 상해에서 맥타이이어 기독교 미션 스쿨에서 공부한 후, 부모의 뜻에 따라 미국 유학을 가서 감리교 배경의 웨슬리언 대학과 기독교 명문 대학인 웰즐리 대학을 졸업하였다.

송미령은 경건한 부모의 영향으로 신앙을 갖게 되고, 미국 유학을 통해 자연스럽게 기독교 신앙과 훈련을 받아 중국의 지도자 국모가 된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제 한중 수교 30주년을 맞이하면서 중국 지도자 중에 송미령은 1966년 대한민국의 독립을 지원한 공로 국민훈장을 수여 받은 사실이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송미령의 기독교 신앙을 소개하고자 한다. 송미령의 신앙을 이해하는 데 아주 유익한 자료가 있다. 그것은 1943년 송미령 자신이 작성한 고백서(I Confess My faith) 내용으로 미국 감리교에서 출판된 팸플릿이다. 짧은 내용이고 학술적으로 서술된 체계적인 팸플릿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송미령의 기독교 신앙을 가장 잘 설명하는 문서 중의 하나이다.

1943년 고백서의 서두에 보면 송미령은 어린 시절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자신은 아주 현실적인 사람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나는 원래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다. 나는 선천적으로 신비적인 사람이 아니다. 현실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스스로 송미령은 자신의 신앙에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이러한 미온적인 신앙에 변화와 회심의 계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어머니(예계진)의 신앙이다. 송미령의 영적인 훈련은 어머니의 영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송미령에 의하면, “(나의 신앙에 영향을 준 것을 말하면) 나는 어머니가 하나님과 아주 가깝게 살아온 것을 알았다. 나는 어머니에게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고 있다. 내가 어린 시절 약간의 반발은 했지만 가정 교육이 나에게 많은 영향을 준 것이라고 믿는다”. “나의 어릴 적에 강한 인상은 집 3층에 방문을 닫고 기도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새벽부터 여러 시간 동안 기도하셨다. 우리가 어머니에게 조언을 구하면 그녀는 “먼저 하나님께 구해야만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결정을 위한 어머니의 기도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언제나 예외 없이 좋은 일이 있었다. 어머니의 생애에서 내가 느끼는 것은 (실패하던)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나를 기도하게 하셨다.”

송미령이 처한 당시 중국은 대내외적으로 일본과 분쟁 그리고 국내의 어려운 상황으로 힘들었다. 이러한 절망에서 송미령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괴로웠다. 송미령은 자신의 무능함을 ”중국 나라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물 한 컵으로 큰 화재를 진압하려는 시도와 같은 것 같다“고 표현하고 있다. 송미령은 자신이 처한 나라의 어려움에서 국가를 위한 애국심을 갖게 되고, 개인적으로 경험한 어머니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게 되는 신앙의 과정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의 여정에서 남편 장개석에게 필요한 역할을 하고자 중국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신앙의 성숙함을 그녀의 고백서에서 보여주고 있다. 

송미령은 자신의 신앙이 추구하는 목표와 방향을 하나님의 인도함에 두고 있다. 송미령은 구체적으로 기도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기도는 하나님의 인도를 얻고, 균형(넘어지지 않는)을 갖는 데 원천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깨우침을 주신다. 나는 유한한 인간으로 종종 갈피를 잡지 못한다. 나는 내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고 불안해한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며, 그다음에 확신을 갖게 되면 하나님께 결과를 맡기고 나아간다.... 내가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이는 라디오 주파수와 같은 것이다. 라디오에 주파수가 맞아야 음악이 나오는 것이다. 주파수를 맞추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의 신앙 고백 마지막 말미에 송미령은 ‘두려움 없이’라는 신앙을 말하고 있다. 송미령의 1943년 신앙고백서를 평가해보면, 이 고백서는 아주 평범한 간증서 같기도 하지만, 이 고백서는 중요한 면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크리스천으로 단순하게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고백서를 통해 중국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고 그것을 고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송미령은 자신의 개인 신앙과 고백을 통해 나라와 민족이 처한 어려움을 염려하면서 나라를 생각하는 애국심을 보여주었다.

미국 ‘타임’지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말을 인용하여 송미령을 “보통 사람과는 다른 특사”라고 말했다. 그 호의 잡지 표지에는 그녀의 천연색 사진이 실렸는데 뒤에는 대나무와 새를 그린 중국화를 배경으로 하여 색채가 부드러웠다. 대통령의 부인 엘리노어의 글도 같은 호에 실렸다. “장 부인은 매우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의지가 강인하며 절대 감상주의자가 아니다. 그녀의 도착은 한 여성에 대한 승인을 상징한다. 이 여성은 자신의 품격과 이바지한 공헌에 의거하여 세계에서 그 지위를 얻었다.” 송미령의 방문에 대하여 미국의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송미령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1931년 10월 26일에 장개석과 같이 ‘타임’지 표지 인물로 선정되었고, 1937년 ‘타임’지의 올해의 인물로 송미령을 장개석과 같이 선정하였다. 논평에 의하면, “서양의 어느 여성도 송미령이 중국에서 가진 것만큼 가진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송미령을 극찬하고 있다. 1943년 3월 1일 미국 의회 연설을 마친 이후 타임 잡지는 표지 인물로 송미령을 단독으로 선정하였다. 1941년 6월 30일 ‘라이프(Life)’ 잡지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을 송미령이라고 했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Knox Kwon (신앙과 사회문화연구소 소장, 총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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