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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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4-05-22 09:48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몽양 여운형(1886-1947) 선생과 기독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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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사에 주요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은 여운형 선생일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여운형 선생에 대한 평가는 그의 정치이념과 활동을 두고 지금도 약간의 논쟁이 되고 있다. 그의 생애와 사상에서 동학, 기독교, 민족주의, 공산주의, 독립운동, 좌우합작 운동의 평가에 이견이 있다. 여운형 선생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 다음 주가 몽양 138주년(2024년 5월 25일) 기념일이라 양평의 몽양 기념관을 찾았다. 필자가 사는 동네는 양평 서종면 문호리인데, 집에서 20리 떨어진 양서면(신원역)에 몽양 기념관이 있다. 여운형 선생에 대한 초보적 지식이지만, 몽양이 독립운동가이며 민족주의자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일 것이다. 필자는 한국 근대사에 관한 지식이 없어 몽양 이해에 한계가 있다. 그러나 몽양과 기독교의 관계는 나름대로 이 칼럼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여운형은 1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평 묘골(묘지가 많은 마을, 지금은 양서면 신원리)에서 태어났다. 여운형 선생의 호는 할아버지 여규신이 ‘태양을 꿈꾸다(夢陽)’의 의미로 ‘몽양(夢陽)’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시기적으로 보면 몽양 여운형이 출생한 1886년은 개화당이 청국의 속방화 정책에 저항하여 조선의 완전 자주독립과 자주 근대화를 추구하여 수행한 갑신정변이 실패하여 청국의 간섭이 더욱 강화되던 시기였다. 그리고 1886년은 최초의 서구식 근대 교육기관인 관립학교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이 설립되던 해였다. 시기적으로 보면 몽양의 시대는 1894년 동학 농민운동, 1894-95년 청일전쟁이 일어난 혼돈의 시기였다. 여운형의 출생과 성장의 배경은 이처럼 국내외적으로 변화의 격변, 다른 한편으로 조선 근대화 운동으로 전환하는 시기였다.

몽양은 어린 시절에 집안에서 동학사상을 접했다.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몽양이 기독교를 접하기는 쉽지 않은 일인데, 이 동학의 사상이 몽양이 이후 기독교 신앙을 수용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본다. 몽양의 조부 여규신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참여한 인물인데, 여운형은 16세까지 조부 아래에서 동학을 수학하였다. 동학이 제시했던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은 이후 여운형이 보여준 봉건타파 정신의 노비해방과 평등사상에 기반이 된다. 여운형은 조부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아 어린 시절 자신의 사상적 배경을 형성해준 분으로 존경하였다.

몽양과 기독교의 구체적인 사건은 배재학당의 입학이다. 배재학당의 입학에 조부와 부친은 반대하였으나, 영어교사인 친척(7촌 당숙) 여병현의 주선으로 15세에 입학하였다. 여병현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상류 지식층과 청년들에게 선교의 목적으로 설립한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기독 청년운동을 활발히 한 인물이다. 여병현은 YMCA 설립을 두고 한국에 온 국제 YMCA 간사 라이언(D. Willard Lyon)을 도왔다. 흥미로운 일화는 여병현이 영국의 선교사 양성학교인 할리 대학(Harley College)에서 유학을 했는데, 이때 한국에 온 의료선교사 스코필드(F. W. Schofield)의 아버지가 그 대학의 교수여서, 런던에서 이후 한국 선교사로 오는 스코필드를 만난 적이 있다. 이 여병현은 몽양의 배재학교 입학과 해외 선교사와 기독교 교육의 현장을 처음 경험하게 해준 사람이다.

배재학당은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대학이다. 아펜젤러는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의 교육과 선교(정동교회)에 이바지한 대표적인 선교사이다. 몽양이 기독교 신앙을 접하게 된 계기가 배재학당인가 하는 문제는 분명하지 않다. 몽양은 기독교에 관한 관심이 적어서 외국 선교사가 운영하는 기독교 교육에 만족하지 못하고 1년 만에 흥화학교(興化學校, 1898년 민영환이 설립)로 전학하였다. 여운형은 배재학당의 엄격한 규율과 신앙이 불편했던 것 같다. 즉 일요일마다 학생들을 예배당에 출석하게 하고 이를 어기는 학생은 교실에 남아서 자습을 하도록 했는데 소년 여운형은 이런 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배재학당에서 외국 선교사들의 ‘우월의식’ 등이 작용했던 것 같다. 그 후 그는 기독교가 아닌 민족정신을 고취할 목적으로 설립된 흥화학교로 전학하였다. 이처럼 여운형이 배재학당에서 1년간 수학한 후 흥화학교로 전학한 배경을 보면, 초기 여운형은 기독교 세계관보다는 민족주의에 더 큰 관심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여운형이 기독교에 입교한 시기는 1906년 고향 묘곡에 묘곡교회(妙谷敎會) 설립과 동시에 입교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예수교장로회의사기, 1906년』 기록에 보면, “여운형 집안에 전도하여 여씨 문중에 기독교에 입교하는 자가 있어 교회가 설립되었다”라는 것이다. 당시 여운형의 나이로 보아 그가 묘골 여씨 문중을 대표할만한 위치에 있다 할 수 없다. 그런데 그의 이름을 앞에 내세운 점으로 보아 묘골 여씨 문중 중 기독교에 입교한 첫 인물이 여운형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1912년 장로회 경기 충청노회에 여운형의 집안 숙부 여승현이 묘곡교회 장로로 장립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여운형의 회심의 시기를 명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교회사 기록에 의하면 묘곡교회 입교 시기인 1906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여운형은 개인적으로도 18세 되던 1903년 상처(喪妻)하고 그가 존경하던 조부도 여의는 아픔이 있었다. 그리고 1905년과 1906년 연이어 모친과 부친까지 세상을 떠나서 심적으로 고통의 시간이었다. 이 시기에 교회에 입교하는 것은 여운형의 개인적 상황을 고려하면 이해가 가는 일이다. 1905년부터 3년간 고향에서 집안 상을 치르면서 1907년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세운다. 여기에서 성경과 지리, 역사, 산술 등 신학문을 가르치며 자강운동을 펼쳤다.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국권 상실의 위기감이 고조되던 시기에 시대의 요구인 개화 자강운동은 국권 회복 운동을 위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광동학교는 서울 밖에서 신학문을 가르치는 최초의 학교였다.

1911년 11월 서울 안동교회에서 개최된 제3회 노회에서 여운형은 양평 상심리교회의 차상진과 차재명과 함께 평양장로회 신학교에 취학하였다. 그러나 여운형이 본격적인 기독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기 시작한 것은 곽안련(郭安連, Charles Allen Clark) 선교사와 연을 맺고 승동교회(勝洞敎會) 조사(助師:helper, 오늘날 전도사와 같은 직분)가 되면서부터라 할 수 있다. 1902년 9월 미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한 곽안련 선교사는 당시 승동교회 담임목사인 무어(Samuel F. Moore) 목사 밑에서 동사 목사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부임 초기 그는 지방 순회전도 목사로 경기 강원 일대 지방을 순회하며 전도 활동을 펼쳤다. 상심리교회와 묘곡교회, 문호교회 등 양평군 일대에 여러 교회를 개척한 것도 곽 선교사였다. 곽 목사와 여운형이 인연을 맺은 것은 곽 선교사가 묘곡교회를 세우기 전부터 경기도 일대 순회전도 활동하면서 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중 승동교회를 설립한 무어 목사가 1906년 세상을 떠나자 그 후임으로 곽 목사가 교회를 맡게 되면서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승동교회 담임목사가 된 곽 목사는 여운형을 그의 조사로 임명하였다. 이후 여운형은 5년간이나 승동교회 조사로 시무하였다. 한편 곽 목사도 같은 해 8월 승동교회 부속으로 기독소학교와 여자소학교를 설립했는데, 선교와 교육을 위해 더 유능한 조수가 필요했고 여운형이 창신동에 살면서 이 일을 도왔다.

여운형이 5년간 조사로 활동한 승동교회는 특별한 교회였다. 승동교회는 당시 서울 장안의 다른 교회들과 달리 천민층이 중심이 된 교회였다. 흔히 승동교회를 ‘백정교회’라 부르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예배당 가운데 휘장을 치고 남녀를 구분하여 예배를 드리던 시절 양반과 노비 더욱이 당시 짐승 취급을 받던 백정들을 교회로 불러들여 함께 예배를 드리도록 했으니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승동교회에 출석하던 양반층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 새로운 ‘양반교회’를 세웠으니 그 교회가 안동교회(서울)였다. 여운형이 5년 동안 조사로 있던 ‘백정교회’인 승동교회에서 사역했다는 것은 1906년 부친이 돌아가신 후 집안 대대로 모시던 조상 신주를 불태우고 노비를 해방했던 자유주의자, 평등주의자의 기질을 지닌 그였기에 가능하리라 본다. 여운형은 고향 묘골에 예배당과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세우고, 1910년 봄에 강릉의 초당의숙(草堂義塾)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다시 승동교회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어 몽양은 평양신학교(1912년-13년)를 다녔다. 당시 평양신학교 운영은 1년 중 9개월은 교회 일을 하고 3개월 동안 집중 강의를 받으면 되었기 때문에 승동교회에 조사로 근무하면서 평양신학교를 1년에 3개월씩 2년을 다녔다. 정식으로 졸업하려면 5년간을 다녀야 했지만 2년 만에 마치고 1914년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Knox Kwon (신앙과 사회문화연구소 소장, 총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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