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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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11-30 20:43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인간의 종노릇에서 벗어나기


20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전 7:20-24)

신약성경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종’ 개념을 많이 사용한다. 상당 부분 비유로 말씀을 강론하실 때 등장한다. 바울 서신에도 많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약속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령 강림 후 기록된 서신서에서 비유보다는 바울을 포함한 사도들과 그의 동역자들이 자신을 직접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고백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선포하신 내용에 보면 종(헬.둘로스)은 대개 주인(퀴리오스)의 상대어로 등장한다. 주인에 대한 절대적 종속과 의존 관계로 존재하는 자가 종이다. 절대적 종속 관계를 다르게 말하면 종은 항상 무조건적 책임을 강요받은 자라는 뜻이다. 이른바 ‘자율성(自律性)’ 개념의 여지는 결코 찾아볼 수 없다. 무한 책임의 불가피한 운명적 존재가 바로 종이다.
이 개념은 우리의 세속적 현대 사회에서는 사라진 개념이라고 한다. 하지만 과거 절대왕정국가에 비교하면 종노릇 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상황이 그때보다 더 자유롭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생존과 직결된 상황, 이른바 직장인들을 ‘현대판 노예’라고 부리는 것은 낯설지 않다. 수많은 법과 제도가 인간을 보호하기도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법의 이름으로 엄격한 규율과 제재(制裁) 속에 종노릇을 강요받는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많은 직장인들이 직장 스트레스가 몰려올 때 ‘지긋지긋하다’고 한다. 직장이라는 굴레에서 좀 벗어나고 싶지만 생존이 달려있기 때문에 다시 종의 신분으로 돌아가야 하는 한탄의 수사학으로 보인다. ‘돈의 노예’라는 말은 자본주의 체제 속 노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다른 표현이며, ‘정보의 노예’라는 말은 자신에게 유리하거나 유익한 정보를 챙기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막대한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뻔히 보고서도 어찌할 수 없는 비참한 상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은유다. 이처럼 ‘종’ 개념은 정보화 사회가 더 첨단화할수록 모든 세계인들이 직면할 상황일 것이다. 자신이 자신에 대해 알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이 점점 사라지고 결국 자율성의 영역이 사라진 현대판 ‘종놈’의 신세로 전락하는 실정이다. 좀 덜한 문명과 문화의 논리에 충실한 종이 되고자 죽고 죽이는 아귀다툼의 신세, 처절한 현대판 종의 신세라고밖에 달리 말하기 어렵다. 참으로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벧후 2:12) 신세 이상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정적인 의미로 파악되는 종노릇에서 벗어나게 하고 ‘안식과 자유와 평안’을 지향한다는 종교 집단 내에서 더욱 악랄하고 교묘하게 다시 인간에 대한 노예화가 진행된다. 기독교 2000년 역사에서 무수한 종교법들은 교인과 신도의 자유와 평안보다는 통제와 관리와 체제 순응의 용도로 악용된 것이 훨씬 많다. 현재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인간을 종교적 노예로 만드는 근본에는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명령’할 수 있다는 매우 오만하고 불손한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과 하늘의 아버지,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주인과 종으로 설명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나 하나님의 대리자인 양 함부로 형제이며 지체이고 동역자인 다른 신도에 대해 교권(敎權)을 빙자해 함부로 명령하고 지시한다. 세상 속에서 종노릇 하다가 몸과 영혼의 안식처로 찾아온 곳이 교회인데 여기서 다시 영혼까지 지배받는 더 심각한 노예화가 진행된다.
앞에서 인용한 본문에서 보듯이 하나님이 부르실 때는 그 백성이 처한 상황에서 소명한다. 당시의 상황이 노예제가 존재하던 시대이므로 종의 신분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성도들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 그런 종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자에게 ‘절대적 자유와 해방’의 소식으로 다가온 것이 바로 복음 진리다. 종의 신분으로 있을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기회를 주면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21절)고 한다. 바울 사도는 세상의 종노릇에서도 벗어나길 간구한다. 하지만 비록 풀려날 수 없는 종의 신분이라도 소명을 받은 백성은 ‘주께 속한 자유자’(22절)며 또한 세상에서는 자유자이지만 그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그리스도의 종’(22절)이다. 왜냐하면 세상에 속한 노예든 자유자든 모두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23절; 행 20:28 참조)의 지체, 형제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노예 신분으로 살아가는 종도 하나님의 백성이며 자유자이고 세상에서 자유자라고 하더라도 그는 그리스도의 종이다. 노예와 자유자의 경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라면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절대진리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주고 또한 배운 관계라면 더더욱 종속관계를 경계해야 한다. 즉 교육에 관한 한 고급정보를 제공했다고 하여 자신의 종으로 만들 심산이라면 이는 이미 그리스도의 몸 된 건전한 성도 관계와는 거리가 멀다. 마찬가지로 진리 수혜자의 처지에서도 진리를 전해준 자에게 스스로를 종속시켜도 온당지 않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부터 보내신 성령(요 14:26; 요 15:26)의 교통하게 하시는 능력(고후 13:13)이 전부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다’(마 6:24; 눅 16:13)는 말씀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씀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에서 오직 ‘하나님의 종’ 그리고 ‘그리스도의 종’만 온당한 개념이다. 사람의 종노릇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 절대진리 성경의 권위밖에 없으며(요 8:32), 모든 성도는 어떤 지배와 종속 관계에도 얽매일 수 없는 오직 진리와 함께 기뻐할 뿐이다.(고전 13:6)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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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택설(supralapsarianism)과 성경권위 회복
철학의 시녀노릇에서 벗어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