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 최하위 사법 후진국 한국에서 신앙적 법과 정의 어떻게 찾아야…
7년 전 2015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우리나라 사법제도에 대한 국민 신뢰도는 최하위권이었다. 사법 농단이 일어났던 박근혜 정부가 국가를 운영할 당시의 평가다. 그 후 ‘촛불혁명’으로 전직 두 대통령을 사법처리하는 사건을 겪었으며 2017년 문재인 정부가 온갖 적폐를 청산한다는 기치를 내건 정부를 출범시켰다. 하지만 사법부와 언론계의 적폐는 세계인들도 조롱할 만큼 답답하고 더딘 사법 신뢰 후진국이다. 그 후 6년이 지난 2021년 8월 <법률신문 뉴스>의 보도를 보면 “한국 사법체계 국민 신뢰 ‘낙제점’... OECD 평균 1/3 수준”이다. 한마디로 현재 사법부에 대한 국민 신뢰가 OECD 국가 중 여전히 최하위라는 말이다. 평가 지표와 기준에 따라 다르다는 사법부의 이의제기도 있지만 한 번만 그런 소리를 더 들으면 유치한 억지 변명처럼 들리는 것은 왜일까.
7년 전이나 지금이나 대한민국 시민들 대부분에게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사법부 불신을 한마디로 꼬집는 일상의 증거다. 2015년 인터넷 포털 뉴스 <법률신문 뉴스>는 우리 국민 1,000명의 응답자가 답한 설문조사 결과 사법제도 신뢰는 응답자 비율 27%에 그쳤다고 했다. 당시 같은 질문을 받은 OECD 회원국 34개국 국민들은 사법부 평균 신뢰도가 54%에 육박했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평균 절반 수준으로 최하위 바닥을 기고 있었다. 우리보다 신뢰도가 낮게 나온 국가는 칠레(19%) 정도였다. 일본도 우리 두 배를 넘은 65%였고 인도네시아도 54% 등 아시아에서 사법제도 신뢰는 우리는 말 그대로 꼴찌였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2021년 인터넷 포털 뉴스 <미디어펜>에 따르면 대한민국 사법부는 물론 교육서비스 만족도나 정부 신뢰도 역시 OECD 평균 미달로 나왔다. OECD가 발간한 ‘2021 한눈에 보는 정부 보고서’에 의하면 OECD 국가들은 평균 57%가 자기 나라 사법시스템과 법원을 신뢰했다. 2010년 기준으로 보면 10년 동안 선진국들은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6% 증가했다. 대한민국은 신뢰도가 2015년에 비해 5% 더 떨어지면서 22%에 불과했다. 내 얼굴에 침 뱉는 말이지만 우리는 사법 정의 최하위 나라에 살고 있는 경제 선진국이다! 졸부 나라라는 망령이 떠도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말인가? 중앙정부 신뢰는 OECD 평균 51%에 비해 우리나라는 45%였다. 그나마 중앙정부 신뢰는 2007년보다 약 21% 포인트 개선되었다. 아마도 코로나19 대유행병에 대한 정부 대응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인 것으로 보인다.
법과 정의를 대통령 후보를 비롯해 정치인들이 밥 먹듯이 말하지만 그것은 공허하거나 거짓말처럼 들린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다. 사법부도 전적으로 국민 세금으로 먹고사는 공무원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정부 신뢰는 그나마 조금씩이라도 높아지는데 같은 공무원이자 그것도 최고 대학의 최고 우수한 자들이 공무원 집단으로 모여 있는 최고의 지식 집단이 같은 경제 규모의 나라에 비해 신뢰도가 꼴찌라는 이 조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참으로 절망적이다. 그런데 하나 분명한 사실이 있다. 지금도 이렇게 신뢰받지 못하는 수재들의 공무원 집단에 들어가기 위해 전국의 부모들은 수백에서 수천, 수억의 비용을 쏟아부으며 족집게 과외 열풍을 이어가고 있다. 이것 또한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가장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공무원 집단에 들어가기 위해 저렇게 천문학적 과외비를 쏟는 것을 보면 그렇게 비난받아도 그곳에만 들어가면 ‘뭔가가 있긴 있구나’ 하는 확신들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도대체 그렇게 국민의 불신을 받는 사법부 공무원 세계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국민의 질타와 비판과 비난을 받아도 당당하게 활보할 수 있게 하는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내 이웃에게 조금의 피해를 주기만 해도 미안하다고 사과하거나 양심의 가책을 받는 보통 시민들과는 전혀 다른 법과 정의의 수호신(?)처럼 행세하지만 국민 신뢰가 꼴찌인 그 공무원 집단의 ‘양심’은 도대체 어떤 모양일까? 수오지심을 말하기가 거의 어려운 듯한 그 집단 양심의 모양새는 어떤 자기 과욕의 자신감을 가진 결정체인지 궁금하다. 코로나19 대유행병 속에서도 ‘케이(K)’라는 이니셜로 상징이 된 대한민국 국가 브랜드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세계 수준을 압도하고 있는데, 국민 신뢰도 세계 꼴찌를 달고 사는, 언론 집단들처럼, 가장 뛰어난 두뇌로 가장 강력한 법 권력을 행사하는 사법부의 바닥 없는 신뢰의 추락 모습은 마치 아름다운 적송에 기생하며 숲의 모든 적송을 고사시키는 소나무 재선충처럼 다가온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대한민국을 위해 기도하는 기독교인들은 그 고민이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언론이나 사법부의 퇴락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속에 있기 때문이다. 왜 꼭 이런 방법으로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이 나라를 주관하시는지에 대한 깊고 강한 질문이 쏟아진다. 국민의 인권과 정의, 시민의 자유와 진실 규명 등을 시민들은 통상 사법부에 맡기지만 그 신뢰는 더 이상 이 사회를 지탱하는 힘은 아니다. 그냥 ‘재수 없어 당했다’고 하거나 ‘돈 없고 줄 없고 백 없어 한스럽다’ 할 뿐이다. 그런데 이런 말을 나도 인정하는 순간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순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며 신앙이 전혀 없는 이들과 별반 차이가 없어진다. 이것을 보면 창조적 건설을 위한 비판을 한다고 하지만 그 본바탕은 별 볼 일 없는 그저 욕구불만을 토로하는 인간 군상(群像)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세상의 법과 정의에 의존해 비신앙인과 더불어 살면서 마치 현대 역사를 해석하듯이 살아간다는 종교인의 태도는 자기기만일 때가 많다. 자신의 이해관계와 직접 관련이 없기 때문에 관심 밖이거나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도한다는 통상적 변명으로 대처하는 기독인의 모습은 이기적이다 못해 자기 자신마저도 자신을 비난할 지경이다. 사회적 정의와 법 상식의 회복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점점 무너지는 현실 상황에서 더 힘들고 더 비참하게 다가오는 것은 역사 섭리의 주관자 하나님의 통치권을 세속적 욕심이 일순간 덮어버리는 상황이다. 이러한 자기 욕심이 지배하는 실존적 정황은 결코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 무능하고 부패한 인간의 본성 그 자체다. 세상 권력과 돈과 법 기술을 적절하게 이용하면서 자신들만의 영달을 추구하는 자들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이 매우 큰 현실에서 하나님의 세상 역사에 대한 절대적 통치를 믿는다는 것은 피조물의 선택 사항은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인류 시조 아담부터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직면했던 딜레마 상황을 다시 정독해 보면 억울함과 분노가 치밀어오는 상황은 믿음의 시작과 과정과 끝이 모두 전능자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와 그 능력의 계시로 향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돈과 권력에 속절없이 파묻히는 불공정과 불법의 현실은 사실 성경에는 수없이 많이 등장한다. 그중에 가장 부당하게 취급당한 한 사건이 있다면 인류 역사의 유일한 가장 위대한 사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종교 권력자들과 돈에 의해 매수당하여 거짓으로 유포된 사건일 것이다. 유대 종교지도자들 집단과 로마 군인들이 만들어낸 예수 부활에 대한 ‘공식적 입장’은 예수의 제자들이 시체를 도둑질해 갔다는 것이다. 사법 신뢰 후진국 대한민국에 대한 개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이러한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조작 사건을 마주하면서 인간의 상상마저도 불허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다시 깊이깊이 뇌리에 고통스럽게 새긴다.
11 여자들이 갈제 파수꾼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12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13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14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하니 15 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마 28: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