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바르트, 자유주의 연속과 불연속
우리는 바르트가 교회의 기능을 “신학, 학문(Theologie, Wissenschaft)”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신학과 학문을 같은 수준으로 놓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밝혔다. 우리는 신학과 일반학문의 성격 차이를 제시했다. 우리의 신학은 합리적인 논증 체계보다 계시적 권위에 근거한 논리를 추구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계시를 이성의 체계 안에 포함시켰기 때문에 신학과 학문을 같은 수준으로 놓을 수 있다. 즉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을 벗어난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을 정통신학 어휘로 다시 정립시킨 것이다.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을 벗어난 이유는 선생들이 1차 대전에 서명하며 지지한 것 때문이다. 즉 선생들의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 윤리를 거부한 것이다. 그들의 가르침을 거부한 것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정치 문제와 신학 문제가 병립할 때에 정확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 신학은 같은데 정치 문제 때문에 존경을 포기하는 사태가 종종 있다. 바르트와 같은 탁월한 수준일 것이다. 정치가 달라도 신학이 같으면 형제이고, 신학이 다르고 정치가 같으면 정치적 동지이다.
바르트는 전쟁에 서명한 자유주의 선생들과 신학이 같은 제자이다. 바르트가 작성했다는 바르멘 선언(1934년)이 유명한 것은 히틀러가 패배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평가하는 것은 바르트의 신학 내용을 정통주의로 평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나치즘(아리안 우월주의, 극단적 인종차별 증오 조장)은 부당한 것이지만, 독일이 나치즘에 동의한 모든 사람을 배제해서 사회를 구축하지 않았고, 지성계에서도 나치즘에 동조한 사상가들을 배제하지 않았다. 마르틴 하이데거, 칼 슈미트, 파울 알트하우스(Paul Althaus) 등은 나치즘에 공개적으로 동조하거나 협력했지만, 전후에도 학문적 영향력이나 신분을 유지했다. 극단적 혐오를 배제하는 것은 오히려 자유주의이다. 그런데 칼 바르트는 정통주의에 대해서 혐오 의식을 감추지 않았다. 바르트는 볼테르가 사용한 문장, “Ecrasez l'inf&ime!(파렴치한을 분쇄하라!)”을 사용했다. 바르트에게 그 “파렴치한(l'infame)”은 ‘종교(Religion)’였다. 바르트는 종교(Religion)와 믿음(Faith)을 엄격하게 구분했다. 바르트는 예수의 믿음을 강조하며, 위로부터 오는 계시를 강조했지만, 그가 말한 예수는 계시의 객관성을 현실화시킨 인간 예수이다. 바르트가 왜곡된 형태를 자연신학, 자유주의, 나치즘으로 분류했지만, 그 범주에 정통신학, 로마 카톨릭도 제외되지 않는다. 그런데 로마 카톨릭에서 칼 바르트의 신학을 수용한 것은 인간이 계시의 담지자가 될 수 있는 구도를 구체화시켰기(교황무류설이 가능함) 때문이다. 로마 카톨릭은 모든 것을 양보해도 교황무류설은 지킬 것 같다. 혐오 의식이 있는 것은 종교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혐오하기 때문에 혐오하는 세력을 혐오하는 것은 결국 혐오 범주에 있다.
바르트가 학문과 신학을 일치만 했다면 바르트는 보수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바르트는 서구권에서 보수적 학자로 평가받는다고 한다. 그것은 다시 신학과 학문의 차별을 주장하기 때문이다(GG., 35). 바르트는 신학과 학문을 동일하게 평가한 자유주의, 슐라이어마허의 제언에 대해서 수정을 시도한다.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I/1의 36-37(박순경 번역)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먼저 옮긴다. 아래의 글은 바르트의 글이다.
특별한 강조 없이 우리가 학문으로서의 신학의 표식을 그 때문에 고수하는 실천적 관심은 이러하다. 즉,
1. 신학이 ‘학문’으로서 표식됨으로써, 신학은 자체를 그 계열에 세우고, 신학은 진리를 위한 인간적 노력으로서 오늘날 이제 우선 이러한 개념 아래서 합일된 바 이러한 종류의 다른 노력들과의 유대성을 고백하고, 신학은 (옛 사람들에 의해서 특징적으로 정립된바 doctrina[교의학] 혹은 sapientia[지식학]라는 표식들에서 쉽게 주입될 수 있었던 것처럼) 다른 노력들 위에 스스로를 존재론적으로 높이려는 생각에 대하여 저항하고, 신학은 다만 ‘학문’일 뿐이라는 것을 자체로 하여금 회상하게 하고 따라서 그 ‘세속성’을 회상하게 하는데, 이 세속성에서 신학은 최고의 영역들에서도 상대적으로 특수한 길에서 그의 일을 수행한다.
2. 신학이 ‘학문’이라는 개념을 단순히 다른 학문들에 맡겨 버리지 않음으로써, 신학은 (고전적 전통에 대한 모든 마땅한 존경에서) 저 승인된 바와 같은 ‘이교도적’ 일반적인 학문개념에 대한 필요한 항의를 또한 천명한다. 이 개념에 관한 불굴의 대표자들의 해석의 유사종교적 무조건성이 사실상 논란되어 있다는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이름과 더불어 시작하는 전통이 어쨌든 다만 다른 전통들 중의 하나라는 사실, 어쨌든 그리스도교 교회는 이제 우선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조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사실을 회상하는 것은 그 불굴의 대표자들에게도, 대학에로 아무러한 손상을 끼칠 수 없다.
3. 결론적으로 신학이 ‘학문’들과 (이 개념이해에서 근본적으로 제거되어서는 안 될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동일한 이름 아래 총괄된다는 사실에 의해서 신학이 그렇게 자체를 다른 이름 아래서 우월하게 그것들로부터 분리시키려 하는 만큼 그들의 이교성을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신학은 신학과제에 대립한 그것들의 투쟁에 진지하게 또한 신학에게는 잡아낼 수 없는 학문개념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들을 자체와 더불어 교회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신학은 죄 사함을 믿고 이교도적 만신전의 최종적 현실을 믿지 않는다. 이러한 신앙의 강조는 여기서 고찰되지 않으며, 그 만신전의 부정은 더욱더 고려 외다. 그런데 신학과 ‘학문들’을 너무도 단적으로 구별함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이러한 구별을 중단하는 의적인-근본적이 아닌-근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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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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