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선취’로 진행하는 바르트의 논리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I/1 읽기(17)
우리는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I/1』 § 1.2 탐구로서의 교의학에서, 바르트가 교의(혹은 교리, Dogma)를 “진술의 추구된 올바른 내용(Rechten Inhalt)”으로 전환시킨 것을 밝혔다. 우리가 갖는 교리 개념은 “삼위일체와 그리스도 양성 교리”로서 325년 니케야 신경, 381년 콘스탄티노플 신경, 431년 에베소 신경, 451년 칼케돈 신경을 축약한 개념이다. 바르트는 교의학 § 1. 서문에서 모든 것을 자기검증(Selbstprufung) 과정을 수행하는 Dogmatik(교의학)을 수행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교회가 결정한 산물은 변형, 준용(mutatis mutandis)이 된다고 밝힌다. 우리는 교회가 결정한 교리는(삼위일체와 그리스도 양성교리) 변경이 불가능하다는 견해이다. 바르트도 불변하는 가치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신의 속성을 “자유와 사랑”으로 규정한 것이고, 정통신학에서 신은 “공의와 사랑”으로 규정하고 있다. 참고로 사랑(Hesed, Agape, Love, charity, Mercy)은 매우 함축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이다.
바르트(1886–1968)는 자기 전제를 세우면서 논리를 전개한다. 전제는 논리가 아닌 선언이며 상호 규약이다. 참고로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도 전제와 상호규약으로 기호 이론(모든 것은 기호이며, 의미는 문화적으로 구성된다)을 형성시켰다. 전제(presupposition)는 엄밀하게 공리(axiom)가 될 수 없으며, 경험적 사실(fact)과 다르다. 바르트의 전제는 “하나님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진술의 올바른 내용이 인간에 의해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Dogmatik als Forschung setzt voraus, daß der rechte Inhalt christlicher Rede von Gott vom Menschen erkannt werden kann).
바르트는 전제와 선취(presupposes and assumption)를 혼용하여 논리를 전개한다. 바르트에게 이 ‘선취’는 논리적 공리(Axiom)가 아니라 신앙적 선언(Glaubensaussage)이다. 선취를 말함으로 논리의 상대성이나 제한성을 갖는다.
※ Voraussetzung 개념도 신학에서 매우 중요하다. “사유가 시작되기 전에 놓인 전제”(objective presupposition, 객관적 전제)인데, 영어로는 Assumption으로 번역하는데, 우리말 번역이 매우 어렵다. 박순경은 ‘신앙함’으로 번역했다. 다른 번역은 ‘선취’라고도 한다. 라틴어로는 praesuppositio(앞서 놓인 것), assumptio(받아들임)이 있다. Assumption of Mary는 성모승천 교리(聖母蒙召昇天)의 용어인데, 그리스도의 Ascension(승천)과 구분하는 용어이며, 수동적 승천을 의미하며, 추정, 받아들임, 인증함 등의 의미이다.
바르트의 선취(Voraussetzung)는 “교의학이 교회 안에서 또 교회와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에게 계시하는 또 화해하는 하나님의 향해 오심”이다. 개혁교회는 ‘선취’를 말하지 않는다. 바르트는 선취(先取, Voraussetzung)를 말하고, 대응해서 반틸 박사는 전제(前提, Presupposition)를 말했다. 바르트의 선취는 “인간을 향해 하나님의 오심(Zuwendung Gottes zum Menschen)”이고, 반틸의 전제는 “하나님의 존재”이다. 개혁신학은 원형신학(Archetypal Theology)과 모형신학(Ectypal Theology)으로 구분하고, 계시에 근거한 모형신학을 추구한다. 바르트도 계시를 강조한 유력한 신학자인데 그의 계시는 하나님이 오심의 인간의 인식에 나타난 것이고, 개혁신학의 계시는 기록된 성경의 충족성에서 선포된 복음에 성령께서 함께 하심(cum verbo) 그리고 성령의 감동으로 듣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이다. 그 계시를 직접적인 신 인식으로 보지 않고, 모형적 인식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바르트는 직접적인 신 인식이라고 담대하게 주장하고 있다. 직접적으로 신을 인식한 인격은 모세이다(출 3장). 그리고 직접적으로 신을 접촉한 1세기 유대인들은 신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신을 직접 접촉하거나 인식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밀교였는데, 칼 바르트는 그 체계를 공식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바르트 신학의 핵심은 “하나님의 철저한 타자성(Otherness)”이기 때문에 직접적인 신 인식을 거부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신의 침투(Zuwendung Gottes)를 병행하기 때문에 접촉을 부정한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바르트는 인간 주도적인 접촉(인식)을 부정했으며, 하나님 주도적인 접촉(계시/침투)을 신학의 유일한 전제로 삼았다. 바르트는 접촉에서 인간의 피동성을 그리고 신의 능동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견해는 존 오웬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강조하는 패턴과 유사하게 보인다. 바르트는 인간의 피동성을 강조했는데, 그의 『교회교의학』에서는 교육, 훈련 등을 매우 강조한다. 계시에 대한 응답으로 제시한다. 계시 수납의 피동성과 응답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패턴이다. 개혁신학, 우리는 바르트와 다르게 오직 은혜(이중은혜, Duplex Gratia)를, 마르틴 루터의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으로 선다.
바르트는 “교회의 존재(dem Sein der Kirche)”의 적합성에 대해서도 규정한다(GG., 37). 개혁신학에서 교회는 표지(Notae Ecclesiae, Mark)로 “말씀과 성례”로 규정했는데,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에 적합할 때”로 포괄적으로 표현했다. 바르트의 개념에서 바르트가 ‘설교’를 강조했다는 주장은 무너져야 한다. 바르트가 계시의 삼중성에서 “선포된 말씀(설교)”을 구도화했기 때문에, 설교를 강조한 것으로 보는 것 같다. 계시의 삼중성에서 선포된 말씀(설교)을 성경과 그리스도와 한 위상에 병렬시킨 것은 매우 부당한 배치이다. 그리고 바르트가 설교를 강조하지 않은 것은 신의 자유로운 침투가 주된 신인식 수단이기 때문이다. 바르트에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한 기관으로 교의학이 실현되는 공간이다.
바르트는 προφητεiα, κατὰ τὴν ἀναλογ&iαν τῆc π&iστεωc(Rom. 12, 6)에서, 박순경은 “믿음의 유비”(τὴν ἀναλογ&iαν τῆc π&iστεωc)로 번역했다. 바르트는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를 거부하고, “신앙의 유비(analogia fidei)”를 했다. 우리말 번역은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이다. if prophecy, in proportion(비율) to our faith(ESV, KJV, NASB 등 다수), then prophesy in accordance with your faith(NIV). 바르트는 인간이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구도가 아니라, 사람이 자기 믿음으로 신과 관계하며, 그리스도를 원형으로 신의 침투로 은혜를 누리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설교와 교의학의 관계는 올바른 내용에 대한 탐구로, 그리스도교의 진술을 탐구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탐구할 때 척도 세움을 거부하고 있다. 그리고 “교의학은 그것을 그리스도교 교회(der christlichen Kirche)와 더불어 주어진 것으로 이해하고 승인한다”(GG., 37)해서 교의학의 상대성을 자연스럽게 용인하고 있다. Mit der Frage nach dieser Gemaßheit untersucht die Dogmatik die christliche Rede. Sie hat also das Maß, an dem sie mißt, nicht erst zu finden, geschweige denn zu erfinden. Sie versteht und anerkennt es mit der christlichen Kirche als gegeben:(KD I/1., 2). 바르트는 교의학을 수행할 때 표준(척도 das Maß, standard)을 거부한다고 했는데, 그가 거부한 척도는 인간이 만들었다는 교리(Dogma)이다. 교회가 판단하는 근거는 교리(Dogma and doctrine)인데, 그 판단 근거를 부정하고, 탐구하는 과정에서 올바른 내용으로 구축했다. 신의 직접 계시와 역사의 문서인 교리는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러나 교리는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과 동일한 내용을 수행하고 있는데, 바르트는 그 견해에 있지 않고 인간이 창안한 문서로 평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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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
Wirklichkeit는 ‘현실(現實)’로 번역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