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23-03-21 20:48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성령의 부어짐(5)


우리는 바르트가 “성령의 부어짐”에 대해서 나사렛 예수에게 일어난 현실성을 근거로 진행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앞에서 바르트에게 전통적인 삼위일체가 없고, 새로운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고 제언하고 있다. 신준호는 『교회교의학』, I/2, 312(KD,, 270)에서 ‘삼위일체’라고 번역한 어휘가 있는데, des dreieinigen Gottes(영어 번역 triune God)를 번역한 것임을 밝혔다. des dreieinigen Gottes를 ‘삼위일체’로 번역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 우리는 ‘삼중일신’으로 번역하는데, 바르트는 여러 어휘를 사용하지만 영어에서도 각각의 어휘로 대응하지 못하고 triune God으로 번역하고 있다. 영어에서는 Trinity와 triune God을 구분해서 번역하고 있으니, 우리도 최소한 ‘삼위일체’와 ‘다른 어휘’로 번역해야 한다. 간혹 ‘삼위일체성’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있는데, 필자는 더 명확한 차이를 인지하기 위해서 ‘삼중일신’이란 어휘를 제언하고 있다. ‘삼위일체’와 ‘삼위일체성’으로 번역하는 유형에서, ‘삼위일체’와 ‘삼중일신’으로 번역할 것을 제언하는 것이다. 지금 미국에서 Trinity와 triune God에서 차이점을 느끼지 않고 교차로 사용하기도 한다. 삼위일체 신관을 견지한다면 반드시 Trinity만을 사용해야 한다. triune God는 바르트가 새롭게 형성시킨 신관을 표현한 어휘에 대한 영어식 표현이기 때문이다.

Alles, was sein kann, alles, was objektiv oder subjektiv möglich ist hinsichtlich der Offenbarung, ist ja nach der Schrift beschlossen in dem Sein und Wollen und Handeln des dreieinigen Gottes.“계시에 관련하여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객관적 혹은 주관적으로 가능한 모든 것은 성서에 의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의지와 행위 안에 포괄되어 있다. 모든 가능한 것은 그 하나님의 능력이며, 그분의 사역으로부터 해석된다.”(신준호)

바르트는 자기의 주장이 불확실할 때에 성서(der Schrift)를 빗대어서 논리를 전개한다. 바르트에게 성경권위는 사상적 권위를 갖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문장의 권위(축자영감)는 없다고 볼 수 있다. 즉 사상에 의해서 성경이 해석되어 전통적 이해는 언제든지 전환될 수 있게 된다. 바르트가 성서의 권위를 피력하는 것은 자기주장의 정당성을 위한 한 방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바르트는 “성서에서 삼중일신의 존재와 의지와 행위가 있다”고 제시했다. 우리는 이것을 바르트의 독단이라고 하는데, 삼중일신에게 존재, 의지, 행위가 있다는 확증을 성서에서 도출시킨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우리는 의지와 행동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음)에 대해서 기독교는 창조와 구속(일반계시와 특별계시)에서 밝히기 때문이다. 만약 바르트가 개혁신학처럼 성경무오성과 축자영감을 견지했다면 그의 주장은 독단이 아닌 계시의존사색으로 볼 수 있다.
삼중일신의 존재, 의지, 행동은 그의 활동(혹은 일, Wirken)이다. 바르트는 성서에 근거해서 삼중일신이 활동한다고 규정했고, 그와 동일한 활동이 아들의 활동으로 규정했다(Sein Wirken ist aber wieder nach der Schrift das Wirken seines Wortes, das Werk seines Sohnes). 그런데 바르트는 신적인 활동과 작업(mit Gott durch jenes göttliche Wirken und Werk)을 위해서는 화해(versöhnt)의 필요성을 제시했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화해가 이루어졌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현실을 창조했다고 제시했다. 우리는 바르트의 제언이 독단적 제언이라고 규정한다. 바르트 개인의 의견과 정통교회의 예수 그리스도 고백과 부합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an Christus zu glauben)는 것을 제언하는데, 마지막 기독교 흔적을 갖고 있는 것이다.
바르트는 이 부분에서 인간이 파악될 수 있다는 사실과 “파악 불가능성(Unbegreifliche)”에 대해서 제시하는데, 이것은 계시된 하나님과 은닉된 하나님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된 하나님이고, 은닉된 하나님은 파악 불가능성에 있다. 바르트의 사유의 기저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중심적 사유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바르트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이 아니라, 계시가 현실화된 성육신으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바르트가 제언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이 있다면 새로운 현실성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다. 즉 성령의 부어짐의 인식 가능성에 들어선 것이다. “성령의 부어짐”은 매우 모호한 표현이다. 그런데 바르트에게 “성령의 부어짐”은 삼중일신의 행동에 바르트처럼 믿는 예수 그리스도 상태에서 현실화된다. 바르트는 롬 5:5을 근거로 신의 사랑이 성령을 통하여 부어졌다고 제시했다(GG., 312).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 성경은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the Holy Ghost which is given unto us)이라고 명시하고 있는데, 바르트는 “우리의 마음 속에서 아니라(nicht in unseren Herzen)”고 제시했다. 바르트는 “신의 사랑”이라는 가능성에서만 성령이 부어지는 것으로 제시한다.
바르트는 다시 성령이 활동하게 되는 가능성에 대해서 제시한다. 성령의 활동은 말씀을 들을 때에 가능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성령의 활동은 그리스도를 믿음과 연결시켰다. 그것은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르트는 성령의 활동을 계시의 주관적 가능성이라고 규정한다. 그것은 계시의 객관적 현실성이 주관화가 되기 때문이다.
바르트가 “그리스도의 몸의 생명(das Leben des Leibes Christi)”과 들음에서 성령의 활동을 지시하면서도, 보고 먹음의 방식인 성례전적 지시에 의한 가능성도 주장한 것은 정상적이지 않다. 개혁신학은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지향하며, 승천하심은 곧 그리스도의 인성(몸)이 세상에 계시지 않음을 확립하고 있기 때문이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6-49문).
바르트는 성령의 활동을 추상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고 제언했다(GG., 312). 바르트의 제언은 주장과 현실이 맞지 않는다. 바르트는 삶에서 발생하는 성령의 부어짐을 강조하기 때문에 추상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추상(abstrakt)이라는 것은 현상과 명확하게 연결될 때에만 추상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개념과 현실이 정확하게 연결되지 않은 것은 부조화이며, 우리는 그 판단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구체적이기가 매우 어렵다. 바르트가 삶을 강조하기 때문에 추상적이지 않다고 할 수 없다. 바르트의 개념(그리스도를 믿음과 신의 자유)이 너무 포괄적이기 때문에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신의 자유 안에서 모든 것이 현실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어떤 삶이라도 의미가 있으며, 혹여라도 의미를 인지하지 못했더라도 은닉된 신의 사랑 안에 있게 되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삶 안에서 발생하는 것은 성령의 활동으로 규정하면서, 길 위에 있는(auf dem Wege entweder) 사람에게는 회의주의(Skepsis) 혹은 거칠게 떠들기(wilden Schwärmerei)에 도달할 것이라고 제시했다(GG., 313). 필자는 바르트의 신학을 도상신학으로 이해할 때가 있었는데, 바르트는 도상(途上)을 거부하고, 오직 성령의 활동, 신의 자유 위에서 가능성을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바르트가 변증법적 신학을 하는 것을 도상신학으로 평가하기도 하는데, 바르트는 도상의 상태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거부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바르트는 성령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계시 수용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규정했다. 계시의 객관적 현실성의 모체는 그리스도의 육신 안에서 발생되었다. 그것이 신의 통치의 행위이고, 계시 실존의 기적과 비밀이다. 인간의 가능성을 현실화시키는 것은 신의 자유와 사랑이다. 신의 사랑에서 성령이 활동하여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이 발생한다. 이것이 “성령의 부어짐(die Ausgießung des Heiligen Geistes)”이다.
바르트가 “성령의 활동”과 “성령의 부어짐”을 교차로 사용하기 때문에 성령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확립하기는 쉽지 않다. 성령은 신의 사랑과 그리스도 자체를 근거로 한다. 그리스도는 계시의 객관적 현실성의 원천(Quelle)으로, 신의 사랑은 성서적 근거에 있다고 한다. 우리는 바르트의 제시가 바르트 개인의 견해임을 반복적으로 밝힌다. 교회는 개인의 견해가 아닌 교리로 세워지고 유지된다(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 바르트의 원점은 일신적 자유와 사랑인데, 정통 교리는 삼위일체와 그리스도 양성교리 그리고 이신칭의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한국성경연구원)
이메일 : ktyhbgj@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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