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23-05-03 16:18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성령의 부어짐(7) 마스터(Meister/Master)


3. Durch die Ausgießung(outpouring) des Heiligen Geistes wird es darum in der Freiheit des Menschen möglich, daß ihm Gottes Offenbarung widerfahren kann, weil ihm in ihr das Wort Gottes unausweichlich zum Meister(주인, 지배자, 대가, 신준호 - 스승) wird(KD., 289, CD., 265).
성령의 부어짐을 통하여 인간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수여된다는 사실을 다음의 이유로써 인간의 자유 안에서 가능해진다. 즉, 그 부어짐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피할 수 없는 방식으로써 인간의 스승이 되시는 것이다(신중호, GG., 333).

“성령의 부어짐”과 “신의 말함”에서 인간은 신의 계시를 경험(Widerfahrnis, 혹은 만남(meet))할 수 있다. 신준호는 widerfahren kann을 ‘수여’로 번역했다. 바르트는 인간이 신의 계시와 만남이 인간의 자유 안에서 가능하다고 규정했다(man in his freedom to be met by God’s revelation). 신의 자유와 인간의 자유가 만나는 것이다.

바르트는 Durch die Ausgießung des Heiligen Geistes wird es darum in der Freiheit des Menschen möglich, daß ihm Gottes Offenbarung widerfahren kann이라는 문장을 세 번 반복했다. 1, 2에서 바르트가 제시한 것을, 우리는 인간에게 신의 말씀이 부어지며 들을 수 있는 가능성(1)을 그리고 그 가능성이 실현되는 길로 신의 말씀이 들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2). 그리고 (3)에서는 마스터(Meister)에 대해서 제시한다. ‘Meister’를 신준호는 ‘스승’으로 번역했다. 정태홍 목사는 Meister에 대해서 민감한 반응을 보였는데, 선(禪)에서 Meister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즉 예수를 Meister로 평가하는 신비주의에 대해서 경종을 울렸고, 예수는 Meister가 아니라 구주라는 것을 주장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함”, “추상화하는 것이 안 됨”, “인간의 자연적인 자유와 능력으로 안 됨” 등을 밝힌다(GG., 333). 이러한 주장은 기독교적 호감을 갖는다. 그러나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 안에서 복음 선포 외에 다른 방식으로도 가능하다는 도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바르트는 교회 밖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 안에서 주어진다는 것을 굳게 견지해야 한다. 1962년 2차 바티칸 공회의에서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 by K. Rahner)을 규정했는데, 그것은 칼 바르트의 신학 체계를 수용한 것이다. 그것은 교회 밖에서도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교회의 범위를 교회가 아닌 우주로 임의로 변경시킨 것이다.

바르트는 이 부분에서 계시의 주관적 가능성을 확정시킨다(GG., 334). 객관적 가능성과 주관성 가능성이 교차되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어떻게 신의 말씀이 인간에게 주어지는가에 대해서 바르트가 설명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나에게 오는지를 설명할 수 있을까? 바르트는 그 길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시도했다. 그러나 명료하게 밝히지는 못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오는 것을 밝히는 것을 시도하지 않았다. 다만 복음을 전했고, 이루어진 교회를 유지했다. 그런데 바르트는 주관적으로 현실화되는 것에 대해서 제시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반복해서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과거에 있었던 한 인간, 계시를 현실화시킨 한 인간이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의 객관성으로 제시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객관성(objective)인데, 다른 말로 번역하는 ‘대상성’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그런데 바르트는 ‘대상’에 대해서 지양하고 있기 때문에 ‘목표성’이라고 번역할 수 있겠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상으로 보지 않고 목표로 설정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를 현실화시킨 목표이고, 한 인간 예수가 계시를 현실화시켰다면 동일한 인간에게도 주관적으로 가능하게 된다는 구도로 이해할 수 있다.

바르트는 계시의 가능성을 신의 가능성으로 규정했다(GG., 334: die subjektive Möglichkeit der Offenbarung ist Gottes Möglichkeit). 신의 가능성에 인간적 참여(menschliche Anteilnahme)가 가능하다고 바르트가 독단적으로 규정한다. 바르트는 신의 가능성에 인간이 참여하는 것이 현실화되는 것을 주장하면서, 황홀경은 부정하지만 동일성에 대해서 유예됨을 밝힌다.

Solche Zustände gibt es freilich, wenn auch nur als Aufhebungen des Identitätsbewußtseins.이 문장은 바르트 논리 전개에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이는데 번역에서 일치되지 않는다. 신준호는 “그러한 상태들은 자기 동일성의 의식이 지양될 때에만 가능하다”로 번역했다. 그런데 구글 번역에서는 “동일성 의식의 유예된 상태(a suspension(유예) of the consciousness of identity)”로 번역한다. 브로밀리는 “~the consciousness of identity is removed”로 번역했다. 그런데 유예로 보는 것이 뒤 문장과 어울린다.

유예된 상태에서 신의 기적이 발생할 여지가 있다. 인간이 계시를 수용할 때에 동일성 의식에서 유예, 혹은 부정이 있다 할지라도, “신의 기적으로 자기와 동일한 인간에게 발생”한다는 것이다(GG., 334). 그런데 바르트는 이 기적이 인간 안에서 발생한다고 제시했다. 바르트는 계시를 수용한 나(새사람)와 계시를 수용하기 전 나(옛사람)를 동일하게 표현하는 것도 특징이다.

바르트는 신의 계시가 인간 안에 발생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나열하려고 시도했다(GG., 333-335). 그러나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했다. 가능성과 현실성으로 제시하고 있다. 신의 가능성이 있다는 규정은 바르트의 독단적 규정이다. 신의 계시(말함)가 인간에게 들려지는 구도를 바르트는 밝혔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듣는지 추상적이거나 애매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아는 자녀는 바르트의 말이 매우 복잡하지만 단순한 맹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교회와 관계없이 신의 말함을 들을 수 있다고 규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바르트의 규정은 『교회교의학』 I/1에서부터 유지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지 확정하지 못한다면 바르트의 세밀한 설계도에 설득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바르트의 규정과 비교해서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은 가능성이 현실화되는 기적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은 약속이고 은혜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에 위탁하신 방편이다. 바르트는 『교회교의학』 이라고 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계시를 교회 밖으로 끌고 나갔다. 교회 밖에 있는 계시는 교회를 소멸시키는 행위이다. 주께서 세우신 교회를 정확하게 인지해야 한다. 신의 자유로 계시의 가능성이 아니라, 구속사의 정점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확립된 교회의 합당한 복음 선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주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에서 피의 복음을 들어야 한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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