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23-10-11 09:19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옛 종교에서 참된 종교로


칼 바르트는 § 17에서 ‘종교의 지양(Aufhebung der Religion)’을 제시한다. 바르트는 종교(Religion)와 계시(Offenbarung)에서 갈등했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GG I/2., 355-363쪽에서 종교와 계시 사이의 상관성을 제시한다.
바르트는 ‘종교’가 토마스 아퀴나스, 루터, 칼빈에서는 “기독교와 동의어”로 사용했다고 제시한다. 이 사용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논의한 것이다. 바르트는 이들의 사용법을 거부하고 계시로의 변이를 제언한다. 그런데 문제는 종교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 종교에 대한 거부는 기독교에 대한 재해석이 된다. 바르트가 형성시키는 계시, 하나님의 계시는 정통 기독교와 다른 새로운 형태가 출범하게 된다.
바르트는 루터와 칼빈의 글을 그대로 평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루터와 칼빈의 글을 평가할 때 그들이 말하지 않는 당시의 너무나 보편적인 가치에 대해서 인지해야 한다. 바르트가 그것을 인지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루터와 칼빈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것은 그들이 개혁한 복음 선포(믿음의 말씀)에 기초한 진행이다. 즉 루터와 칼빈이 말하는 종교의 기본에는 복음 선포가 있는 예배이다. 그런데 루터와 칼빈의 글에는 복음 선포에 대한 강조나 흔적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독자들이 루터와 칼빈의 사상에 있는 복음 선포의 중요성을 놓치게 된다. 그 실수가 바르트에게도 있다.
칼빈은 “순수하고 변질되지 않는 종교” 그리고 “종교의 씨앗”에 대해서 말했는데, 바르트는 그것을 종교의 개념과 연결시킨다. 그것은 칼빈이 “종교의 씨앗”에서는 미신, 우상숭배가 나온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있다. 바르트는 칼빈이 종교와 계시의 연계가 없음을 지적할 뿐이다(GG., 355).
우리는 종교개혁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간략하게 생각해 보자. 종교개혁은 교회의 가르침(교황주의)이 부당함을 성경 가르침으로 지적하며 교정을 주장한 것이다. 어떤 분들은 “종교개혁”이 아니라 “교회개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종교”라고 말한 것은 바르트가 지적한 것처럼 당시에 보편적으로 사용한 어휘이기도 하다. 종교개혁은 진리의 길을 교회의 가르침에서 성경의 가르침으로 더 좁게 규정한 것이다. 그런데 바르트가 제언하는 계시로 구도화시키는 것은 길을 종교개혁 당시보다 더 넓게 규정하는 것이다. 좁은 길을 갈 것인가? 넓은 길을 갈 것인가? 넓은 길을 가려면 바르트의 길을 선택하면 된다.
바르트는 칼빈이 “성령의 내적 증거”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서 “대단히 경악할 정도로 부수적인 역할”로 평가했다(GG., 356). 그리고 바르트는 Abraham Heidanus(1597-1678)를 제시했다(GG., 357). 바르트는 하이단이 칼빈과 데카르트(1596-1660)를 경합시켰다고 제시했다. 유럽에서는 동년이나 연하 연구자의 탁월한 영향을 받기도 한다. 바르트(1886-1968), 폴 틸리히(1886-1965) 등 현대신학자는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1889-1976)의 영향을 받았다.
바르트는 하이단이 당시 무신론자들을 위한 변론을 위해서 데카르트적 사유를 사용했다고 제시했다. 이것은 슐라이어마허(1768-1834)가 『종교론』(1799년)을 쓴 목적과 동일하다. 『종교론』이 쓰여질 때는 프랑스 혁명으로 유럽은 격동의 시절을 보냈을 것 같다. 그 후로 백 년이 지나면 1차 세계대전이 발생한다. 바르트는 단순하게 지적할 뿐이다. 우리는 하이단과 슐라이어마허의 실수를 반면교사로 삼아, 철학자들을 위해서 철학자의 방식이 아니라 더욱더 정교한 신학적 사유와 성경해석 산물을 내는 것을 지향한다. 바르트처럼 계시를 강조하면서 역사적 신학과 성경해석의 규범성을 무시하지 않는다.
17세기까지 유럽에서 종교는 기독교였다. 그런데 18세기 후반부터 참된 종교는 “하나님의 의지”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종교가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의지로 변이되는 과정을 발전으로 평가했다(GG., 359). 그리고 “참된 종교와 거짓 종교, 종교와 미신”을 대립시켰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자기 개념인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을 참된 종교 개념으로 추가시킨다.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은 바르트가 만든 어휘이다. 바르트의 ‘현실성(Wirklichkeit, reality)’ 개념은 결코 쉽지 않은 어휘이다. 이 단어는 루터에게서도 나타나는데 루터가 말하는 ‘현실성’(가능성과 현실성)과 바르트가 말하는 ‘현실성’(믿음과 현실성)은 같지 않을 것이다. 바르트의 어휘 개념은 칸트와 헤겔에 많은 근거를 두고 있다. 헤겔 좌파를 대표하는 인물은 포이어바흐, 스트라우스, 마르크스, 키에르케골, 니체인데, 바르트는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 정승훈 교수는 발티안도 바르트 우파가 있고 바르트 좌파가 있다고 하며, 장신 측은 거의 바르트 우파로 분류했다. 바르트 우파는 바르트가 다원주의자가 아니라고 하고, 바르트 좌파는 바르트가 다원주의자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바르트 좌파(본 발타자르)들은 바르트가 변하지 않은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바르트는 종교개혁 이전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1900년대까지 교회를 분석하며 종교의 변이를 밝혔는데, 계시에 의한 것이 아닌 종교에 의한 종교로 비판했다. 그러한 분석은 타당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타난 현상으로 원리를 판단하는 것은 좋지 않다. 원리와 현실이 같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은 원리와 현실이 맞지 않는 상황에서 원리로 돌아가려는 회복 운동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현상에 대한 비판에서 원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원리를 부정하고 새로운 길을 제안하는 모습이다. 바르트는 현상을 잘 분석했을 것이다. 그러나 원리로 돌아가지 않고 새로운 길을 마련했다. 이것은 칼 마르크스가 종교를 아편으로 분류한 것과 유사하다. 마르크스는 종교를 아편으로 분류하면서 종교의 원리 회복이 아닌 종교 파괴를 주장했다. 니체는 권력의 의지로 평가하고 영원불멸이 아닌 영원회귀를 긍정하는 초인(Übermensch)을 제안하며 종교 파괴를 주장했다.   
바르트는 계시의 필연성을 주장한다(GG., 361). 루터는 하나님의 필연성에서 사유를 시작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으로 시작하는 사유를 종교라고 규정하고, 계시로 시작하는 사유를 참된 종교로 규정하고 있다. 계시의 필연성에서 가능성과 현실성이 파생되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이전 “교의학”을 “종교철학”으로 규정한다.
바르트는 중세 교회, 개혁 교회, 근대 자유주의의 종교 개념을 정리하면서 부당함을 제시했다. 그것은 종교이기 때문이다. 참된 종교는 우상적인 것이 아닌 계시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 바르트의 주장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성육신과 성령을 보내심)에서 출발했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한국성경연구원)
이메일 : ktyhbgj@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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