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탐구에서 인식할 수 있는 계시내용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I/1 읽기(18)
우리는 앞에서 선취(Voraussetzung)에 대해서 제시했다. 선취는 전제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증이다. 선취(先取, Vorgriff, Presupposition/Assumption)는 미리 파악함 또는 앞서 이해함이란 의미로,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와 그의 제자인 한스-게오르그 가다머(Hans-Georg Gadamer)의 철학에서 핵심 어휘이다. 바르트는 전제(Voraussetzung, Presupposition)를 사용했다.
1, 탐구로서의 교의학은 하나님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진술의 올바른 내용이 인간에 의해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GG., 37)
(1. matik als Forschung setzt voraus, daß der rechte Inhalt christlicher Rede von Gott vom Menschen erkannt werden kann(KD I/1., 10).
1, Dogmatics as an enquiry presupposes that the true content of Christian talk about God can be known by man(CD I/1., 12).
2. 탐구로서의 교의학은 하나님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진술의 올바른 내용이 인간적으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GG., 39).
2. Dogmatik als Forschung setzt voraus, daß der rechte Inhalt christ-licher Rede von Gott menschlich erkannt werden muß(KD I/1., 12).
2, Dogmatics as an enquiry presupposes that the true content of Christian talk about God must be known by man(CD I/1., 13).
『교회교의학 I/1』 § 1.2 “탐구로서의 교의학”은 두 문항을 중심으로 진술하고 있는데, 두 문장에 대해서 한국어에서는 의미 차이가 잘 드러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독일어, 영어에서는 kann / can(가능성)과 muss / must(필연성, 당위성)로 의미 차이가 있다.
바르트는 사람이 “올바른 내용(der rechte Inhalt)”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과 필연성에 근거해서 교의학을 수행한다.
바르트가 “올바른 내용”을 인식할 수 있다고 ‘가능성’을 개방한 것인데, “올바른 내용”은 바르트가 ‘교리’로 개념화한 어휘이다. 그 가능성을 수행하는 것이 ‘교의학(Dogmatik)’이 될 것이다.
그 가능성의 기준(Kriterium)을 “인간 예수 그리스도(der mensch Jesus Christus)”로 세웠다(GG., 37). 서철원 박사는 바르트의 그리스도 이해는 인간 예수에 근거한 상승기독론이라고 주장했다. 어떤 연구자는 하강기독론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연구자는 옆으로 기독론(Lateral Christology)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참고로 “옆으로 기독론”은 바르트가 신(神)과 인간(人)의 관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정의했음을 강조하는 연구자들이 제시하는 규정으로, 예수의 이웃 사랑과 약자들과 연대, 환대를 추구하는 패턴이다. 우리는 두 방향의 기독론을 규정하고, 옆으로 기독론도 상승기독론의 범주로 넣어야 한다고 제언한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대로 견지하는 것이 하강기독론이고, 그 외에 모든 그리스도 이해는 상승기독론이다. 바르트의 신학은 “인간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Kriterium)으로 삼고 수행되었다.
바르트는 교회에 하나님이 약속했다고 전제하고, 교의학은 교회의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 진리로 규정했다(GG., 37). Dogmatik setzt voraus, daß Gott in Jesus Christus, wie er das Sein der Kirche ist, d. h. wie er sich selbst der Kirche verheißen hat, die Wahrheit, und zwar nicht nur in sich, sondern (wir erkennen ihn ja und wir erkennen ihn nur im Glauben an Jesus Christus) auch und gerade fur uns Wahrheit ist(KD I/1., 11). 바르트가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독단이다. 그가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권적으로 자신을 계시한 사건적 은혜 때문에 그 인식이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즉 바르트가 기준으로 세운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완전하게 계시가 실현되었다는 전제이다. 바르트가 인식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세운 것은 그의 독단이다. 2번 항목에서 성경을 말하지만, 개혁신학 인식론에서 성경이 인식가능성의 기본구도이고, 성경과 독자의 직접적인 만남이 아닌 성경과 설교자와 청자의 만남으로 인식하는 구도를 취한다. 바르트가 예수 그리스도의 충족성을 말해서 긍정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개혁신학에서 충족성은 성경에 부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죄성을 부여한다. 바르트는 “인간 예수”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무죄성은 정통신학과 같을 수 없다.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무죄성을 존재론적 사실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에 대한 인간 예수의 순종(Obedience)이라는 사건으로 이해한다.
교회의 진술내용에서 올바른 내용을 인식할 가능성과 당위성은 진술내용의 정당성보다, 수용하게 하는 신적인 행위의 사건(dem Ereignis des gottlichen Handelns)이 있어야 한다.
2. 탐구로서의 교의학은 하나님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진술의 올바른 내용이 인간적으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GG., 39).
바르트는 올바른 내용을 인간이 인식할 당위성의 기준을 “인간 예수 그리스도”로 세웠다. 바르트는 척도를 “인간적인 터득(전유 혹은 습득: appropriation)의 행위(Akt menschlicher Aneignung)”로 규정했다(GG., 39). 인간이 기간을 통해서 습득했다는 개념이다. 즉 예수의 성육신의 완전성에 대한 부정(정통교회가 가진 하나님의 성육신을 부정함)이기 때문에, 바르트는 하강기독론이 될 수 없다. 즉 동일한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탐구할 대상이 된다. 바르트는 하나님을 인식대상으로 하지 않는다고 규범화했다(GG., 40). 그것은 개혁신학은 인식대상은 하나님이 명확하지만, 인식하는 구도는 계시문서인 성경에 근거해서 인식대상을 믿으며 고백한다. 우리는 신학을 인식의 구도가 믿음의 훈련과 정진으로 세우고 있다. 바르트는 신학을 인식의 구도로 구상화시켰다. 그 인식의 기준과 척도가 인간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인식의 기준과 척도가 아니라, 죄사함과 영생을 주시는 주와 구주이시다.
바르트는 진리가 도래한다고 규정했다(Die Wahrheit kommt: KD I/1., 13). 그 진리의 길을 좁은 길, 십자가 신학으로 일치시키는데, 부당한 매칭이다. 마르틴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인간의 영광, 가치, 가능성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좁은 길은 넓은 길과 대조되는 길인데, 바르트의 길은 결코 좁지 않다. 진리가 도래한다는 개념은 인식의 가능성과 필연성을 의미하지만, 불가지론이다. 개혁신학은 진리의 확정성과 절대성을 갖기 때문에, 미래에 도래하는 체계가 아니라, 하늘보좌에 진리를 둔다.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탐구가 아니라, 믿음으로 복음을 들을 때 성령의 조명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선포되는 바른 내용, 들을 때 주시는 성령의 조명으로 진리를 믿을 수 있다.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 믿음의 주를 붙들고 의지하며 위로와 소망이 주어지는 은혜이다. 우리는 이해, 인식을 추구하는 신학을 피하고, 믿음 정진에 굳건하게 서도록 훈련하게 한다. 안셀름의 신학과 유사한 이해를 추구하는 신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을 하는 바르트의 신학을 경계하며, 믿음 훈련을 정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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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
‘선취’로 진행하는 바르트의 논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