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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공유 작성일 : 22-07-13 19:35  글자크기 크게글자크기 작게 기사 출력하기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계시를 수용할 공간과 장소로서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한 실존 안에서 성령과 대면하는 인간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1권, 1/1권(1932년)과 1/2권(1938년)은 계시 이해(신의 말, Wort Gottes als Rede Gottes)를 다루고 있다. § 15.에서는 계시의 객관적 가능성(예수 그리스도)을, § 16.에서는 계시의 주관적 가능성(영, Geist)을 제시한다. 칼 바르트는 계시를 “삼중적 형태(dreifachen Gestalt)”라고 규정했다. 바르트에게 신은 항속적이고, 과거에 계시된 사건이 있었고, 현재 계시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계시된 말씀(the revealed Word, 예수 그리스도), 기록된 말씀(the written Word, 성경), 선포된 말씀(the preached Word, 설교)으로 규정했다. 삼중적 형태 중에서 “지금 그리고 여기(hic et nunc)”에 임하는 하나님의 계시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서 바르트는 계시의 현실성(Wirklichkeit der Offenbarung)과 가능성(Möglichkeit)을 강조하며, 현재 계시를 부정하는 것(Leugnung der Offenbarung)에 대해서 거부했다(GG., 263, KD., 224).
참고로 현실성은 가능성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능태와 현실태(potentiality and actuality, 可能態-現實態)의 쌍으로 사고 체계를 구성했는데, 현실태는 가능성이 온전한 의미에서 실체화될 때, 즉 가능성이 운동, 변화, 활동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정의했다(참고 위키백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質料, matter, hyle)와 형상(形相, form, eidos), 가능태(potentia, dynamis)와 현실태(actus, energeia)로 규정했으며, 가능태에서는 규정할 수 없지만, 현실태에서 말할 수 있다. 형상은 질료에 어떤 작용이(동력인) 부여되어 만들어진 현실태가 있다.
바르트는 신에게도 현실성을 사용한다(Wirklichkeit Gottes). 그리고 계시의 가능성에서 계시의 현실성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계시의 주관적 가능성이 있으면,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이 있게 될 것이다. 바르트는 계시의 가능성에서 현실성으로 옮겨 가는 것을 성령의 은혜의 진리, 성령의 현실적인 인침으로 연결했다(GG., 263).

계시의 가능성과 현실성으로 구분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사유 체계를 답습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바르트의 계시 이해를 “계시발생주의와 계시연속주의”로 규정하고 있다. 즉 현재도 계시가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현재 하나님의 계시가 발생하는 것에 대한 논의는 신학에서 민감한 사안이다. 개혁된 교회는 성경의 충족성(The Sufficiency of Holy Scripture)을 견지하기 때문에 계시종결주의를 견지한다. 참고 성경 구절은 계 22:18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이다. 계시가 더해진다는 것을 허락하지 않음이며, 기록된 성경으로 구주 예수를 온전하게 계시하여, 구원 얻음과 구원받은 백성으로 사는 것에 부족함이 없다(요 20:30-31). 다른 계시를 추구하는 것은 결국 다른 복음을 구성하겠다는 주장이 된다. 다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은 길 외에 다른 방편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조금은 자극적인 표현이지만, 아리우스가 제시한 예수 그리스도와 바르트가 제시한 예수 그리스도, 누구의 제시가 더 정통 고백에 가까울까?
바르트는 계시된 존재의 현실성(신의 현실성)을 말하면서, 그것에 대해서 믿음과 순종을 요구했다(GG., 264). 바르트의 독단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것 중의 하나는,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행동한 객관적 위치로 규정한 것이다.
바르트는 신이 인간을 파트너나 동역자로 삼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결단할 사안으로 제시했다. 그래서 신과 인간은 주님과 주님의 종, 창조자와 피조물, 화해자와 은혜 입은 죄인, 구원자와 그 구원을 언제나 기다리는 자로 대면하는데, 성령이 마리아를 대면하는 것과 같이 대면한다(GG., 265). 바르트는 성령과 마리아의 대면을 모델로 세우며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을 진행하고 있다. 성령도 하나님이기 때문에, 성령의 사역도 계시가 되고, 그를 인식하는 것은 계시의 인식이고, 계시의 증거의 인식도 동일하다. 바르트는 성서적 인간(biblishe Mensch)을 종교적 인간론(religiösen Anthropologie)이나 기독교적 인간론(christlichen Anthropologie)이 아니라고 제시했다(GG., 265). 바르트는 자유주의에서 예수나 바울이 강조되는 것의 부당성을 제시했고, 루터는 죄인들의 칭의의 현실성, 칼빈은 죄인의 성화와 현실성을 강조했는데, 성령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연결시켰다(GG., 266).

그리고 계시를 수용하는 인간에 대해서 제시한다(Offenbarung empfrangenden Menschen, GG., 267). 계시가 수용되는 것은 계시의 현실성인데, 신의 선택과 부르심, 말씀의 들음을 통하여, 성령의 증거를 통하여 보이지 않고 내적인 작용을 통해서, 그리고 외적으로 드러나는 구조이다(GG., 267). 계시를 수용한 인간은 대단히 특수한 인간이다. 그런데 바르트는 계시를 수용하는 것에서 민족이나 교회의 소속에서 수용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제시하며, 신의 작용이라고 제시했다(GG., 268). 그런데 구약 시대에는 계시의 수용하지 않은 사람에게 심판의 표징이 있는데, 신약 시대에는 이방인에 대한 개방성으로 누구나 계시를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구약과 신약으로 오면서 민족이 아닌 교회라는 공간이 형성되었는데, 교회가 계시의 수용자로 만드는 현실적이고 명백한 궁극적이고 배타적인 장소에 대해서 인정한다(GG., 269). 그런데 예수와 교회의 관계에서, 바르트는 예수가 교회를 형성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있고 그다음에 교회를 통해서 교안 안에 믿는 자들이 있다고 했다(GG., 269). 즉 계시의 수용이 공동체의 내부에서 발생한 것을 제시했다(GG., 269).

그렇다면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명제가 타당할 것인데, 바르트는 그 명제가 적용되는 것을 기괴하다고 평가했다(GG., 274).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인이기 때문에, 교회 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와 신과 인간의 화해가 발생했다는 것이다(GG., 272-273). 바르트는 이러한 현상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유일무이한 현실성”, 즉 객관적 현실성으로 규정했다. 이것은 바르트의 독단이다.

바르트는 교회를 새롭게 규정한다. 바르트가 규정하는 교회는 역사 안의 장소 혹은 공간(Ort oder Raum Geschichte), 계시 수용이 발생하는 곳으로 규정했다(GG., 273). 그 정당성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관계를 주어와 술어 관계로 제시하며, 그리스도가 술어가 된다면 죄와 배반의 교회이며, 이단적 교회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GG., 273).
바르트는 역사적 교회(historic Church)에 대한 개념을 거부하고, 영에 의한 교회, 공동체를 규범화시킨 것이다. 어쩌면 바르트는 역사적 교회를 인간의 독단적인 힘(jener aufschießenden Eigenmächtigkeit des Menschen)으로 형성시킨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고, 인간의 자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으로 교회를 구성시키려고 한다. 분명한 것은 바르트가 주장하는 참된 교회(wahre Kirche)는 역사적 교회는 아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지체, 기관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실존하는 것(und immer sofern sie von Jesus Christus her existiert)을 제시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이 인간의 독단적인 힘을 거꾸러뜨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으로 성령과 대면하는 공동체를 추구했다. 그러나 정통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교회를 이루어 말씀과 성례로 교제를 힘쓴다(행 2:46-47). 교회는 신의 자유가 현실화되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칭송을 받으며, 구원받은 사람이 증가되도록 하는 기관이다. 성령과 대면을 갈망하거나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선포된 말씀을 그리스도인은 듣고 지킨다(계 1:3). 바르트는 교회의 강단에서 계시의 말씀을 해석하여 선포되는 장소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한 인격의 실존 안에서 이루어진 성령의 역사로 계시가 수용되어지는 공간으로 평가한 것이다. 이 계시의 수용하는 방편에서 성경에 근거한 복음선포로 제한한다면 이단적 교회가 될 것이다. 우리는 계시를 수용하는 것이 아닌 은혜를 추구한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한국성경연구원)
이메일 : ktyhbgj@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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