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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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6-03-10 10:16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종교 건축과 기독교 건축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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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염소가 스스로 심히 강대하여 가더니 강성할 때에 그 큰 뿔이 꺾이고 그 대신에 현저한 뿔 넷이 하늘 사방을 향하여 났더라(다니엘 8:8, 개역성경)

가장 강한 후계자 ‘디아도코이 전쟁’이 일어나다(그림1)

‘디아도코이(Diadochoi, δaδοχοι)’는 그리스어로 ‘후계자들’이라는 뜻이다. 알렉산드로스 3세(알렉산더 대왕) 사후에 정상적인 후계자가 확정되지 않자, 제국을 분할 통치하던 장군들이 서로 자신이 후계자임을 내세우면서 내전을 벌였다. 이 일련의 전쟁을 일반적으로 ‘디아도코이 전쟁(Wars of the Diadochoi, BC 323년~BC 281년)’이라고 부른다. 약 40여 년 동안 지속된 이 전쟁은 거대한 마케도니아 제국(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분할을 둘러싼 정치적 권력 투쟁의 전쟁이었다. 전승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 3세가 임종 직전 “누가 후계자인가?”라는 질문에 “가장 강한 자에게”라고 답변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아시아·아프리카 대륙에 걸쳐 있는 광대한 마케도니아 제국을 분할 통치하던 장군들 사이에서 스스로가 정당한 후계자임을 주장하는 권력 다툼이 일어난 것이다. 전쟁 초기에는 여러 장군이 각자 세력을 형성했으나, BC 301년 입수스 전투를 계기로 헬레니즘 세계는 네 개의 주요 세력으로 재편되었다. 셀레우코스 1세는 시리아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한 동방 지역, 리시마코스는 트라키아 소아시아 일부 지역, 카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 그리스 지역,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이집트 팔레스타인 지역을 각각 통치하였다. 향후 이들 왕조는 이후 수 세기 동안 존속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쇠퇴하였다. 내부 갈등과 분열이 반복되는 가운데 결국 헬레니즘 왕국들은 하나씩 로마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헬레니즘 시대

알렉산드로스 3세 사후부터 이집트를 통치하였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로마 지배하에 들어가기 전까지를 일반적으로 ‘헬레니즘 시대(Hellenistic period, BC 323년~BC 30년)’라고 한다. 다만 헬레니즘 시대의 범위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따라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일부는 알렉산드로스 3세의 동방 원정부터를 그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알렉산드로스 3세의 정복 전쟁 후 그의 제국이 디아도코이 장군들에 의해 분할되면서, 그리스 문화는 이전과 달리 새로운 문화가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기존의 그리스 문화가 지중해 중심의 도시 국가 문화였다면, 헬레니즘 시대에는 그리스 문화가 페르시아·이집트·메소포타미아 등의 동방 문화와 결합하면서 새로운 문화적 융합이 이루어졌다. 알렉산드로스 3세는 동방 원정 과정에서 여러 지역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건설하였다. 이러한 도시들은 그리스 문화의 확산 거점 역할을 하였으며, 동시에 정복한 땅에 그리스적 정치 질서와 도시 문화를 이식(移植)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헬레니즘 세계에서 왕국들은 정치적으로는 서로 독립된 체제를 유지했지만, 문화적으로는 그리스 전통과 동방 문화가 혼합된 헬레니즘 문화의 꽃을 피웠다.

헬레니즘 시대 건축 설계 이면에는 권력의 상징과 왕권 강화가 있었다(그림2)

고대 그리스 고전기 건축은 여러 신전에서 나타나듯 개별 건물의 비례와 조화에 중점을 두었다. 반면 헬레니즘 시대의 건축은 도시 하나 전체를 오늘날 신도시처럼 배치했던 구조가 특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건축 설계 이면에는 권력의 상징이 부각(浮刻)되도록 하는 동시에 통치자의 계획에 따라 효율적인 도시 관리와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이 시대 건물의 기둥 양식은 그리스 시대부터 이어져 온 투박하고 무게감 있는 도리스식, 양의 머리처럼 우아한 이오니아식에 더해 아칸서스 잎으로 화려하게 조각한 코린트식 주두((柱頭) 양식이 있었다. 이 시기 널리 사용한 코린트 양식은 헬레니즘 시대를 상징하는 기둥 건축 양식으로, 통치자들에게는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데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한다.
헬레니즘 시대에 뛰어난 도시 계획과 건축 기술은 오늘날 이집트 북부 지중해 연안에 있었던 알렉산드리아와 소아시아의 페르가몬에서 잘 드러난다. 오늘날 튀르키예의 서부 지역에 베르가마(Bergama)로 불리는 페르가몬(Pergamon)의 아크로폴리스(Acropolis)는 가파른 언덕 지형을 활용하여 신전, 극장, 도서관 등을 계단식과 건물 구조를 비대칭적으로 배치해 건설하였다.
특히 페르가몬 제단(Pergamon Altar)은 헬레니즘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잘 알려져 있다. 기존의 일반적인 신전과 달리 제사를 위한 웅장한 제단을 중심으로 만든 것이 주요 특징이다. 이 제단은 높은 기단 위쪽에 넓은 계단이 있고 상단에 제단이 있는 구조로 대략 가로 36m, 세로 34m로 매우 큰 규모로 세워졌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제단을 둘러싸고 있는 약 113m 길이의 프리즈(friezes, 조각 작품)이다. 이것은 고대 세계에 있어서 가장 거대한 신화를 조각으로 표현한 서사 작품 중 하나로 평가하고 있다. 이 작품의 신화적 주제는 기가노마키아(Gigantomachy)이다. 이 서사는 그리스 신화에서 등장하는 올림포스의 신들과 거인족(Gigantes)의 전쟁을 다루고 있다. 이는 신들의 질서가 혼돈의 세력과 충돌에서 이기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부조에 나타난 인물들은 생동감 있는 강한 입체감과 격렬한 동작, 그리고 감정 표현을 통해 장면마다 매우 극적인 분위기로 묘사되어 있다. 기가노마키아는 당시 사람들에게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그리스 세계관을 상징하는 이야기였으며, 정치적인 상징으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페르가몬의 건축물 가운데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페르가몬 도서관이다. 이 도서관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견줄 정도로 20만 권의 도서를 소장할 수 있는 규모가 매우 컸다고 한다. 페르가몬의 도서관에서는 경쟁 관계인 알렉산드리아에서 파피루스 수출을 제한하자 이를 대신하기 위해 필사본 재료로 양피지(parchment) 기술을 크게 발전시켰다고 한다. 양피지로 만든 책은 파피루스보다 내구성이 높아 훨씬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었다.
코이네 헬라어, 유대인의 보편적 신앙 확장 언어가 되다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3세가 동방 원정 중 BC 331년에 이집트 지중해 연안에 건설한 도시이다. 알렉산드로스 3세 사후 이 도시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통치 아래 들어갔다. 알렉산드리아는 고대 세계에서 가장 체계적으로 계획된 도시 중 하나로 평가된다. 도시 구조는 격자형(block grid) 도시 계획을 기반으로 하였으며, 직선 도로와 규칙적인 블록 형태의 구획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도시 중앙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대로인 카노픽 가도(Canopic Way)는 도시의 핵심축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계획적 설계는 군사 이동, 상업 활동, 행정 관리에 있어 매우 효율적인 도시 구조로 조성되었다.
알렉산드리아는 단순한 항구 도시를 넘어 고대 세계의 지식 수도로 불렸다. 그 중심에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Library of Alexandria)과 학문 연구기관 무세이온(Mouseion)이 있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는 약 40만~70만 권에 달하는 두루마리 문서가 소장되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인쇄술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파피루스 두루마리로 이루어진 이 정도의 분량은 고대 세계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방대한 규모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통치자들과 학자들은 이 도서관에 세계 모든 지식을 집대성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등 여러 문명권에서 천문학, 역사, 철학, 수학 등의 서적을 수집하여 그리스어로 번역하고 필사본으로 보관하였다. 이러한 학문 정책에는 알렉산드로스 3세의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적 전통이 영향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이 시기에 알렉산드리아는 바벨론 포로 이후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도시 인구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면서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이 사용한 언어는 지중해 연안 국가들의 국제어 ‘모두가 함께 쓰는 그리스어’라는 코이네 헬라어(Kοινὴ Ἑλληνικn)였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도서관 장서 확충 정책의 일환으로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도록 지시하였다. 동시에 헬라어에 익숙한 유대인들을 위해 이 번역작업이 필요하기도 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이스라엘 12지파에서 각각 6명씩 총 72명의 학자를 초빙하여 72일간 번역하였다고 전승되고 있다. 이를 일반적으로 ‘70인역(Septuagint, LXX)’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코이네 헬라어가 헬레니즘 세계의 공통어로 널리 쓰인 것은 구약 성경이 유대인에게 한정된 공동체를 넘어 보편적인 신앙으로 전환하는 데 결정적 도구가 되었다. 그리고 연구기관 무세이온 역시 오늘날 대학 캠퍼스 규모의 학문연구 단지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헬레니즘 건축은 왕권과 신의 위엄을 시각화, 제국 권위의 상징적 공간

알렉산드리아의 대표적인 종교 건축물 ‘세라페움(Serapeum) 신전’은 그리스와 이집트 종교 요소가 합쳐진 ‘세라피스(Serapis)’ 신을 숭배하는 중심 신전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그리스인과 이집트인을 동시에 아우르는 통합 신, 정치적·문화적 통합을 위한 헬레니즘 인공적인 세라피스 신 우상을 만들었다. 이 당시 백성들은 알렉산드리아의 최대 신전인 세라페움에서 정기적 제의(祭儀)에서 축제와 함께 희생제물을 바쳐서 풍요와 생명의 평안을 기원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헬레니즘 시대의 종교 건축은 장엄함과 극적인 연출 효과를 통해 인간의 감각을 압도하는 동시에 권력과 신성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건축물을 바라보는 순간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며, 신비스러운 종교를 체험하는 공간으로 기능을 하였다. 다시 말하면 헬레니즘 건축은 왕권과 사람의 손으로 지어진 신의 위엄을 시각화하여 제국의 권위를 드러내는 상징적 공간이었다. 이러한 문화 배경에서 초기 기독교 역시 헬레니즘 세계의 언어와 도시 문화 속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이오현 편집국장 ((주)한국크리스천신문, 장안중앙교회 장로)
이메일 : donald257@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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