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신정론의 담론(談論) - Ⅴ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로마서 5장 13-14절 개역성경)
보편적인 사람들이 말하는 죄로 말미암은 불안감, 압박감, 연약성에 있어서 대부분 인간은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래서 고대부터 원시적인 종교 형태로, 종교 지도자들이 자연과 영혼 세계와의 소통을 중시하며 샤먼(주술사, 무당, 영혼 세계와의 중재자 등)의 역할을 하면서 영적 존재와 연결되어 있는 것같이 가장하여 치료, 예언, 의식 등의 무속 행위를 하는 샤머니즘(Shamanism) 사상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특정 동물이나 식물(토템)을 숭배하도록 하여, 이를 통해 공동체의 정체성과 연결된 신앙 체계를 구성하도록 하는 토테미즘(Totemism) 사상이다. 종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사상 등에 의한 가상의 신과 신상을 만들어 주인으로 섬기게 했다. 이들은 이러한 것을 기반으로 종교활동의 수단인 죄를 등장시켜 순복(順服)이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복(福)과 저주 그리고 죄의 면죄, 구원의 대가로 값진 물질과 결부시킨 이권(利權)을 종교활동의 목적 대상으로 삼아왔다.
또한, 이러한 형태들의 종교는 지난날 인류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정치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만든 제정일치(祭政一致) 국가의 원동력이 되었다. 21세기 오늘날도 변함없이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무속신앙과 일부 종교 단체들은 어느 시점에서 번성했다가 자기들의 모순에 쇠퇴했다가 또 다른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반복적인 행사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시대에 따라 인간들의 최대 약점인 죄를 이용하여 가상의 신을 빙자한 그들만의 교리를 정립하며 사람들을 미혹하여 교세를 확장시켜 왔다. 그만큼 인간은 죄에 대해 너무나 나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죄로 인한 저주와 복만큼 인간의 심성을 자극할 만한 재료가 없다. 이러한 무리에서 기독교만은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러나 각종 매체를 통해 드러나는 것을 보면 전통 기독교에 속한 일부 지도자들도 무속에 가까운 종교활동의 행태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번 호는 인간들이 종교성을 갖도록 하는, 하나의 수단인 ‘죄’에 대해 성경에서는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한다.
‘죄’를 담론하기 전에 먼저 선과 악에 관련하여 세부적으로 탐구해 보려고 한다. 지난 호에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 관점으로 하나님 기준에서 ‘선(좋으심)’과 ‘악(싫으심)’을 ‘관념적 실재(觀念的 實在)’라고 하였고, 이러한 것들의 대상이 구체화 된 것 즉, ‘좋은 것(좋으신 것)’과 ‘악한 것(싫으신 것)’을 ‘구체적 실재(具體的 實在)’라고 정리했었다. 여기서 먼저 하나님 입장에서 ‘싫으신 것’을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그중 첫 번째는 하나님의 절대이성 속에 관념적으로 실제 존재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인간의 내면에 구체적으로 싫은 것의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입장에서는 ‘싫으심’인 관념적 실재는 인간이 선악을 아는 것을 싫어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생각을 말하고, ‘싫으신 것’인 구체적 실재는 아담이 실과를 따 먹고 선악을 알게 된 사실을 말한다. 창세기에 기록된 에덴동산 사건에서 아담에게 하나님 입장에서의 구체적 실재로서의 ‘싫으신 것(악한 것)’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에덴동산의 율법으로 명했던 사실이 있다. 그러므로 아담에게서의 구체적 실재의 ‘싫으신 것(악한 것)’이 타락 이전에는 구체화 되어 있지 않았고, 하나님 기준에서도 구체적 실재로서의 ‘악한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관념적 실재로서의 ‘악’과 ‘악한 것’은 이미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로고스 λoγοc) 속에 내재 되어 있었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내재된 악한 마음에서 욕심이 발동하여 그 대상이 구체화 되었을 때 ‘악한 것’ 이것이 ‘죄’로 구성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 먹을 대상으로 삼았을 때 아담의 마음 상태, 즉 인간의 욕구, 욕망, 탐욕 등을 ‘죄’라고 말하고,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 상태, 내적인 욕망이 외적인 행동으로 나타났을 때 이것을 ‘범죄’라고 한다. 이러한 것을 나무의 비유로 요약하면 악은 뿌리, 죄는 줄기, 범죄는 열매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기독교 전통신학에서는 율법을 어겼을 때 이것을 악, 죄, 범죄로 의미상으로 구분하지 않고 보편적으로 ‘죄’라고 단정하고 있다. 이들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율법이 없이는 죄를 판가름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자들이 자신들은 율법주의자가 아니라고 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율법 없이 죄가 성립되는 것은 이해하기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위의 본문 로마서 5장 13절, 14절의 증거와 같이 죄가 율법과의 관계에 있어서 상관없이 율법 이전에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기 이전 백성들은 율법이 없는 상태에서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지만, 아담이 지은 그 죄로 인한 사망이 왕 노릇한 것을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여기 “율법이 있기 전”이라는 말씀에서 나타나듯이 하나님께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명하시기 전에 이미 죄의 삯인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증거는 창세기에서 가인과 아벨의 제사 중에 하나님의 열납 여부에 대해 성경 말씀을 통해 알아보려고 한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사를 열납하셨다. 그때에 가인의 얼굴에 분한 마음의 상태가 나타났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세기 4장 7절 개역성경)라고 말씀하셨다. 이 일이 있을 때는 모세의 율법과 전혀 상관없는 훨씬 이전이었다. 이 본문에서 죄의 소원이 가인에게 있었다고 했고, 이로 말미암아 동생을 살인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결과 가인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이리저리 떠도는 유리하는 자가 되었다. 이 사건에서 분명히 ‘죄의 소원’이라는 문구를 통해 모세의 율법 이전에 죄가 있었음을 명시하고 있다. 이 외에도 노아 홍수시대 때 사람들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했던 것과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 조카 롯이 살던 소돔성도 죄악이 극심했던 것을 보면 이 역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명하시기 이전에 죄가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다.
이러한 논리들은 기독교 전통신학의 관점에서는 모순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율법을 범하는 것을 죄라고 인식하는 일반적인 견해는 생각의 범위가 매우 협소한 상태에서 나오는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전통신학 연구자들은 율법과 죄의 관계를 새로운 관점에서 인식 변화와 함께 근원적이고 광범위한 측면에서 신학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다수의 신학자가 주장하는 교리들은 종교철학에서 기인한 윤리, 도덕을 기반으로 한 사상에 의한 독선이나 궤변,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대적이고 언제나 변할 수 있는 가변적이면서도 주관적인 판단으로 정립해 왔다. 그러다 보니 미숙한 신학을 계승한 또 다른 미숙한 신학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성도에게 물음표 가득한 보따리만 안기고 말았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진리는 오직 성경을 중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를 불변적이고 절대적이며, 객관적으로 봐야 한다.
<다음 호에 계속>
참고문헌 박용기, 『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진리의말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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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이오현 편집국장 ((주)한국크리스천신문, 장안중앙교회 장로) 이메일 : donald257@nate.com |
창조 질서에 따른 성별 정체성 회복 |
가시를 통한 하나님의 교훈(고후 12: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