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오피니언

 
작성일 : 25-12-02 12:52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안식하는 인간


인류는 끊임없이 일하는 존재로 정의되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호모 파버(homo faber-도구를 만드는 인간), 한나 아렌트가 주목한 호모 라보란스(homo laborans-노동하는 인간), 그리고 사피엔스 이후 강조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지혜로운 인간)까지, 우리는 늘 “일과 성취”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을 단지 일하는 존재로만 보지 않는다. 인간은 또한 안식하는 존재(호모 오티오수스, homo otiosus)이기도 하다. 여기서 라틴어 otium은 단순한 게으름이 아니라 창조주와 교제하며 평화를 누리는 거룩한 쉼을 뜻한다.

성경에는 안식을 가리키는 중요한 두 용어가 나온다. 카타파우시스(katapausis)와 사바티스모스(sabbatismos)이다. 이 두 단어는 단순히 육체적 휴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종말론적 소망에 연결된 깊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다.

히브리서 4장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카타파우시스는 ‘쉬게 하다, 멈추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파생되었다. 이는 단순히 노동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 안에서 완전한 안식에 들어감을 의미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약속의 안식처로 받았지만, 불순종으로 인해 완전히 누리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히 4:1)라고 경고한다. 즉 카타파우시스는 단순히 땅의 소유가 아니라, 믿음으로 순종할 때 주어지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뜻한다.

히브리서 4장 10절은 이렇게 선언한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이는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를 마치시고 안식하신 사건과 연결된다. 창조주의 안식은 피조물을 향한 무관심이 아니라, 완성된 세계를 기뻐하시며 머무는 사랑의 평화였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누리는 카타파우시스는 하나님 안에서 “이미 완성된 구원”을 신뢰하며 참된 쉼을 맛보는 것이다. 즉, 카타파우시스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감이다.

히브리서 4장 9절은 또 다른 독특한 단어를 사용한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여기서 “안식할 때”로 번역된 말이 바로 사바티스모스이다. 이는 성경 전체에서 단 한 번 등장하는 희귀어인데, 문자적으로는 ‘안식일 지킴, 안식일적 삶’을 뜻한다.

사바티스모스는 단순히 과거 이스라엘이 지킨 제7일 안식일 제도나 땅에서의 휴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궁극적인 종말의 안식, 곧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릴 영원한 평화”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카타파우시스가 “현재 믿음 안에서 누리는 쉼”이라면, 사바티스모스는 “장차 완전히 드러날 안식”을 지향한다.
교부 오리게네스는 이를 “영혼이 하나님과 하나 되어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참된 고향에 이르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주님, 우리 마음은 주 안에서 안식하기 전까지는 쉼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이 사바티스모스의 소망을 노래했다. 즉, 사바티스모스는 남아 있는 안식의 실재이다.
이 두 개념은 오늘을 사는 성도에게 중요한 균형을 준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노동하며 호모라보란스로 살아가지만, 동시에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호모 오티오수스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즉 예수님은 단지 휴식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안식의 본질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이다.

칼 바르트는 “안식은 인간의 활동 중단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즐기는 행위”라고 말한다. 이는 게으름과는 정반대의 개념이다. 인간은 노동과 창조적 활동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지만, 안식 속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고 신뢰함으로써 그 형상을 완성한다.

오늘날 우리는 “과로 사회” 속에 산다. 생산성과 효율성을 최우선으로 삼는 세상에서 안식은 낭비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진정한 인간다움은 쉼 속에서 회복된다. “휴식할 줄 모르는 자는 일할 줄도 모른다”는 철학자 에리히 프롬의 말을 기억하자.

성경의 안식은 단순한 휴가나 힐링이 아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며, 종말의 소망을 바라보는 삶의 자세이다. 안식일이 단지 주간의 한 날로 국한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된 안식은 매일의 삶 속에서 경험되며, 장차 올 영원한 안식을 예표한다.

안식은 인간이 창조주와의 관계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고유한 선물이다. katapausis는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하는 현재적 쉼을 말하고, sabbatismos는 장차 영원히 누릴 종말론적 안식을 지시한다. 두 개념은 긴장과 조화를 이루며, 성도를 homo otiosus로 세워준다.

시편 기자의 고백은 이를 잘 요약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 46:1).

우리가 누리는 참된 안식은 세상이 주는 안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주시는 평화다. 그러므로 오늘도 믿음으로 안식하며, 장차 다가올 안식을 소망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온전한 인간의 길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여인갑 장로 (지구촌교회 / (주) 시스코프 대표이사·경영학 박사)

어머니, 열정, 미소, 사랑, 영원
종교 건축과 기독교 건축 (8)